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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식어가는데, 마실 줄 몰라요

#11. 관계의 편식, 탈 나다

by 생쥐양

지금 시각 오후 4시, 동영상 강의에 집중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점심에 먹었던 김밥 두 줄은 소화를 마치고 나의 허벅지에 1mm의 살을 보태주었고, 도서관 앞에서 뽑아먹은 500원짜리 캔커피는 나의 정신을 깨주었기에 '최고의 전사'의 모습을 갖추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사실, 이런 상태에서는 지루하고 미루어두었던 강의를 듣는 게 낫다. 스승에게 '지루하다'는 표현은 예의가 없어 보일 수 있는데 내 경우엔 수업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연민으로 사용 중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하신 설교나, 붓다가 사람들에게 전파하신 설법이 휘향 찬란하고 재미있어서 듣고 따르는 게 아니듯이, 나 또한 강사의 언변에 의해 강의를 결제하진 않지만 강의 내용이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눈과 귀로 흘러들어오는 내용들을 뇌 속으로 구겨 넣고 있는데, 늘 조용히 수업만 하시던 강사님이

"그런데, 여러분은 제 수업이 들을만하시나요? 제 목소리가 수면제 같다고 와이프가 그러던데.. 혹시 주무시고 계시는 학생들 없으신가요?" 뜬금없이 내 마음을 찌른다.

당황스러움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제가 여러분이 합격하셔서 좋은 배우자 고르라고,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라며 나의 집중력을 흔드신다.

동영상 강의의 장점은 멈추었다 들을 수 있고, 반복해서 들을 수 있고, 속도 조절이 가능한 것 등 셀 수 도 없이 많은데 그중에서 최고는 'SKIP' 기능이다. 언제든 건너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의 가르침'이 될 것만 같은 배우자에 대한 이야기라니...'SKIP'을 누를 수가 없다.


"잠시 책을 덮으시고 눈을 감아보세요. 지금까지 자신이 만났던 남자, 그리고 여자에 대해 떠올려보세요. 수강생 중에 신부님은 안 계시겠죠?"

이젠 농담 던지기도 제법 자연스럽게 하시는 걸 보니 내 마음의 당혹스러움도 사라져 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떠올려보세요. 그 사람의 생김새, 성격, 나누었던 이야기, 추억의 장소... 다들 공부만 하시느라 100명을 사귀고 하신 건 아닐 테니 10분 정도 드려도 될까요?"


10분이 지나고,

"자... 눈을 한번 떠보실래요.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닌데 다들 기대하시는 눈빛들이 느껴집니다. 음... 앞으로 배우자를 고르실 때 그동안 연애하며 만났던 사람과 반대되는 사람을 만나면 됩니다."


나는 순간 머리털이 곤두 섰다.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에 힘이 풀리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강사님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어떠한 농담도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고, 수업을 이어나가셨다. 늘 그러했듯이 그분은 2시간의 수업 동안 물 한잔도 마시지 않고 삐딱하게 칠판 앞에 서 있지도 않으며 카메라를 응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분의 구부러진 등과 흰머리가 빼곡히 뒤덮인 뒤통수에서 환한 빛이 나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습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기상 습관, 운동습관, 식습관 등 우리 삶의 전체는 습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에게는 '관계의 습관'이 있다. 친구뿐 아니라 이성에게도 적용되었는데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유형의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관계의 수준을 높이는데 열정을 쏟으며 '왕자님 만들기' 목표에 도달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10억 만들기' 목표를 세워서 이루고 나면 행복감도 잠시 '이젠 무얼 하며 살지?'라는 허무함이 몰려오는데 , 그럴 때는 '매일 10만 원씩 저축하기'라는 목표를 세워 죽을 때까지 지키며 살아가면 된다고...

왕자님이 돼버린 그 남자는 날개를 달고 날아가고, 목표를 이룬 나는 더 이상 어떤 흥미도 느끼지 못했던 연애의 실패작들이 떠올라 한 동안 멍하니 있었다.

관계의 편식에 탈이 날 법도 한데, 그동안 눈치채지 못하고 익숙한 사람만을 고집하며 살아왔던 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위염'도 '비염'도 편식의 증상이었을 텐데 말이다.


내 앞에서 묵묵히 커피를 내려주는 나의 '커피소년'에 대해 누군가가 그의 성향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아는 거라곤 그의 이름과 나이, 직업뿐 그의 취미며 가장 좋아하는 원두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한 편으로 불편한 진실이 있었다. '우리는 20대에 만났지만 30대는 함께하고 있지 않을 거라는'

강사님의 예언에 의한다면, 나의 관계의 습관을 탈피하게 해 준 '묵묵하고 따스한' 그가 나의 배우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나의 합격에 대한 열망도 커지는데, 이 정도면 신랑감으로 최고의 조건이 아닐까? 하지만 그도 나를 그렇게 생각할는지 확신은 없다.


이렇듯 인생에서 넘어야 할 산은 취업이 끝이 아닌가 보다.

그러니 나의 커피는 오늘도 식어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동안 위염도 비염도 찾아오지 않았으니, 우리는 여전히 20대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대 여, 천천히 흘러가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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