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호구, 주인공 되다
대학시절 친구 한 명이 결혼을 한다며 청첩장을 보내와서 주말에 만남을 갖기로 했다.
사실 우린 대학시절, 학과에서 유명한 'SES'였다. 그 당시에는 여학우 세 명이서 뭉쳐 다니면 'SES', 네 명이서 뭉쳐 다니면 '핑클'로 불렸기에 어디 과에나 아이돌들이 존재하였다.
우리 과는 남학우가 70%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세 명이서 뭉쳐 다니던 아이들은 우리뿐이라, 적어도 학과 내에서는 유일무이한 '유명 걸그룹'이었다.
하지만 어느 그룹이 그러하듯, '센터'가 있었는데 이번에 결혼을 한다는 친구가 그 자리를 맡고 있었다.
얼굴도 예쁘고, 학과 점수는 올 A에, 신상 아이템만을 걸치고 다니는 부유한 친구였기에 어딜 가나 교수님이며 동기와 선후배들까지 그 친구를 좋아했다. 드라마 속에나 있을 법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그녀가 우리 멤버라서 나 또한 어딜 가도 그럭저럭 예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대단했던 친구가 초고속 취업을 시작으로 스물여섯에 결혼까지 한다니 문득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친구의 취업 축하 자리 이후로 3년 만에 보는 거라 떨리는 감정이 드는 건, 단순히 내가 고시생이어서가 아니다.
대학시절 4년 동안, 'SES'멤버로서 내가 저질렀던 호구 짓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3일 밤을 꼬박 새워서 만든 리포트 빌려주기, 늦잠 자서 결석 예정인 친구 대신해 수업 참관하기, 일찍 일어나 수업 자리 맡아주기, 학교 식당 앞에서 줄 서있기, 미용실에서 머리 하는 친구 기다리기, 주말이면 친구 집 근처에서 놀기, 방학 동안 해야 할 체크리스트 만들어주기 등...
부모님이 나를 키우실 때 호구 짓을 하라고 가정교육시킨 것도 아니고, 학교 도덕 시간에 친구 부탁은 무조건 들어주라고 수업받은 것도 아닌데 몸에 밴 호구 짓을 그렇게 4년이나 하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지워지지 않는 수치스러운 감정들을 안은 채로 주말을 맞이했다.
"연주야, 여기야" 멀리서도 한눈에 띄는 제스처로 나를 부르는 그녀를 발견하였다.
"어머, 얘 진짜 오랜만이다. 공부한다고 그 새 얼굴이 상했네" 여전히 직설적인 말투로 나의 입을 막는 기술은 여전하였다.
"하윤이는 어제 야근해서 피곤하다고 오늘 못 나온대, 걔는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만 힘들면 투정 부리는 건 여전하다니까. 오랜만에 연주 너도 보고 셋이 뭉치려 했더니... 아 참, 이따 우리 예랑이 보여줄게. 여기로 온댔거든"
"아... 남편분?"
"얘 얘, 남편이 뭐니 촌스럽게. 요새는 예랑이라고 불러. 예. 비. 신. 랑. 주변에 나 말고 결혼한 친구 없어?"
"응, 네가 처음이네"
오가는 대화 속에 꽃이 피기는커녕 불꽃이 일어 가고 있을 무렵 커피소년이 나의 전화벨을 울리며 불을 잠재워주었다.
"야 임연주, 너 남자 친구 있어?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 누구야? 뭐하는 사람? 나이는? 설마 대학교 걔는 아니지?"
"야, 그때가 언젠데 내가 아직도 걔를 만나. 만난 지 얼마 안됐고 그냥 작은 가게 하면서..."
"어? 오빠 여기여기"
그냥 질문이었을 뿐인데, 나에 대한 관심으로 착각한 나머지 발끈하려다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반지가 너무 반짝거려 두 번째 참을 인을 새겨보았다.
"인사해, 우리 오빠"
"오... 빠? 아, 안녕하세요. 저는 라별이 친구 임연주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우리 아기 친구라고 하니 더 반갑네요."
예비신랑이 오기 전까지 기세 등등하게 있던 그녀는 소개를 마친 후부터 슬슬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올해 39세로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의 끝자락에 마흔을 바라보고 있어서 서둘러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며 현재 개인 병원 의사라고 한다.
"제가 성형외과 의사라, 연주 씨 오시면 DC 많이 해드릴게요. 그런데 연주 씨는 미인이시라 하실 필요도 없네요. 제가 우리 아기는 좀 해줬는데. 으하하하하"
멋쩍스러운 웃음과 함께 눈에 띄는 팔자주름 시술이 시급해 보이는 그가 엘리트 친구의 '예랑이'라는 게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렇게 나란히 앉아도 마주 보고 있어도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은 나에게
"사실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내 결혼식 부캐 좀 받아줘. 네가 그래도 친한 친구고 결혼식에 대학교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적당히 떠오르는 사람이 너 밖에 없더라고. 해줄 거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결혼식에 갈지 말지도 결정을 못 내렸는데, 부캐를 받아달라니... 너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4년의 호구 짓을 했던 습관으로 나의 고개는 자동적으로 끄덕이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당당하게 애기를 꺼냈지만 결혼식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 부캐 받을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움직이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은 신부도 아니면서 마사지를 받고, 네일 샾에 들리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는 등 열심히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빳빳한 봉투에 축의금과 편지 한 통, 면접 때 입으려고 아껴둔 정장 한 벌이 내가 가진 전부다. 그래도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러 당당히 결혼식장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순간 대학 동창회에 온 줄 알았다.
교수님, 선. 후배, 동기들이 죄다 삐까뻔쩍한 양복과 백을 두르고 또각 소리를 내며 내 앞에 우르르 모여있었다. 친구가 학과 내에서 유명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부캐 받으실 친구분이죠? 여기 앉으세요" 자리마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신부 측 부모님 뒷자리에서 조명을 한 아름 받으며 나의 까만 정장이 하얗게 반사되는 느낌마저 든다.
"하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결혼식이 곧 시작될 예정이니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멘트 뒤로 조용한 울림이 느껴지는 그 순간, 아는 듯한 희미한 얼굴이 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온다.
"나 안 늦었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옆자리에 앉는 사람, 그 남자다. 늘 향긋한 커피 냄새가 몸에 배어있는 그.
"어떻게..."
"같이 왔어야 했는데 미안. 그래도 사장님이 배려해주셔서 일찍 나왔더니 안 늦었네. 부캐 받고 나서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자."
아무 일 도 없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이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나를 구해준 백마 탄 왕자님이 따로 없다.
방금 전까지, 인간극장 3부작을 찍고 있던 드라마 속 '조연'이었던 내가 멜로드라마 주인공이 된 듯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네 인생에서 주인공이 왜 1명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각자 드라마 장르가 다를 뿐, 우리는 결국 모두 주인공이었을 텐데 말이다.
20대 초반에 찍었던 '호구' 영화가 20대 중반이 넘어서 '호러'영화가 될 뻔했지만 다행히 막은 여기서 끝났다.
빨리 부캐 받고 '멜로'영화나 찍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