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완 Sep 06. 2021

가족이기에 더 힘든



치매에 걸리신 앞 집 할머님이 오늘은 집 앞에 나와계십니다.

항상 친절하게 인사하시는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 가족을 기억하고 반듯하게 인사하십니다.

하지만 할머니를 돌보고 계신 따님만 나타나면 야단법석이 일어납니다.


"엄마 그거 우리 고추 아니라니까요."

"이거 지금 안 따면 안 돼. 놔둬, 놔두라니까? 그런데 왜 밥은 안주는 거야?"

"좀 전에 드셨잖아요."

"뭘 줘. 난 먹지도 않았는데, 너만 맛있는 거 몰래 사 먹고 오는 거지?"


치매에 걸리신 어르신보다 돌보시는 따님이 더 안쓰럽게 다가옵니다.


하루는 할머니를 돌봄 센터에 보내고 오시는 따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집은 미국에 있지만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한국으로 오셨다고 하십니다.

따님은 미국에서 사회 복지사로 일하면서 여러 어르신들을 돌보셨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경력이 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본인을 찾아와 부모님의 케어를 직접 부탁하는 분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너무 벅차다고 고백합니다.

타인의 가족을 돌 볼 때는 능수능란하게 발휘되던 실력이

본인의 가족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족 관계와 계약관계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일로서 사람을 상대하는 것과 가족으로서 대하는 마음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족은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관계 형성의 과정이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릅니다.

함께 오래 지내다 보면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이 눈에 띕니다.


부부간에도 그렇지만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할 것 같았던 부모님이 어느 순간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살아온 시대와 삶의 과정이 다르니 세상을 보는 시선도 틀어집니다.

갈등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발생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쌓여 온

해소되지 않은 피해의식이나 갈등이 폭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상처를 치유해가면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해가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몸이 멀어지면서 마음까지 멀어지는 관계도 많습니다.

이름만 가족일 뿐 남보다 못 한 관계라고 스스로 고백하고 맙니다.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프 톨스토이의 명저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입니다.

행복이 비슷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문장에는 살며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가족은 화목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안고 있는 상처를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거울을 세워두고 세심하게 살펴보면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비밀 같은 상처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상처가 가득한 상태에서는 상대방을 안을 수 없습니다.

아프고 덧나고 피가 나는 상황에서 끌어안으려고만 하면 상처만 악화시킬 뿐입니다.

때론 섣불리 다가가기보다 기다리고 지켜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차올랐던 감정이 가라앉으면서 

마음 한 편에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기도 합니다.


친구들을 만나 속 깊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힘겨운 가족 문제를 털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서로 풀어놓는 아픔의 이유와 원인이 다르다 보니

들어주는 것 외에는 딱히 도움을 줄 수도 없습니다.

스스로 마주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술 털어놓는 고민들을 듣다 보면

나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귀 기울여 들어주는 친구들에게 편안하게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불안한 마음을 떨구고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찾습니다.


나에게도 가족으로 인해 아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상처를 준 적도 참 많았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제법 묵직하게 자리 잡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잊을 만하면 떠올라 가슴에 저린 마음을 남겨 놓습니다.


스스로 감당해야 함을 알지만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감하며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들어주는 이의 친절은 생각보다 든든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내 안의 상처는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깨달아 갑니다.

여전히 나에게 주어진 숙제임을 알지만 상처는 조금씩 회복해 갑니다.

친절히 들어주는 누군가의 염려와 관심 덕분이었습니다.






치매 어머니를 돌보시는 따님의 고통을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힘겨운 고백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할 뿐입니다.

부디 지치지 마시기를, 

그리고 남은 세월 어머니와 좋은 기억만 남기셨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인사를 건넸습니다.


따님은 조만간 행정적인 문제로 미국에 잠깐 다녀오신다고 하십니다.

어머니가 걱정된다고 하시면서도 미국에 있는 딸을 만날 생각에 들뜬 마음이 엿보입니다.

사랑에 정답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사랑으로 아픈 마음은 결국 사랑으로 치유되는 것 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혼을 고백하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