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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Nov 03. 2021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결혼한 지 2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오래 지내다 보니 지금은 서로 눈치껏 서로를 배려하며 살고 있습니다.

언제 싸운 적이 있었나 돌아보면 몇 년 전 기억을 떠올려야 할 만큼

부부는 이제 서로에게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나 한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툼이 이어졌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결혼은 새로운 다툼 거리를 만들어냅니다.

첫 아이를 낳고 나서는 전쟁이 일상처럼 이어졌었습니다.


칼로 물 베기가 이런건가 싶었습니다. 

싸움과 화해가 반복되던 그 때 그 시절은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이혼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사랑해서 선택한 사람이기에 갈등을 끊어내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습니다.

사랑을 위한 노력도 갈등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사소한 지점에서 원인이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하루는 아내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한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이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애쓰던 남편은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아내는 거동도 하지 못하는 남편을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남편을 지긋이 바라봅니다.

매일 같이 말을 걸고 손과 발을 닦아주며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 시간이 벌써 3년이 넘었다니 아내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정성인지

화면 밖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상황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눈물겨운 이야기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누구나 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생각했습니다.

"저 아주머니 정말 대단하네. 나는 절대로 못할 것 같아."

아무 감정 없이 터져 나온 말이었지만 살며시 아내의 감정을 건드린 것 같습니다.

"그래? 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풉, 자기가? 나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면 때리지나 마시지?"

농담으로 치부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나는 자기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것 같아."

깎아주던 과일을 입에 넣어주면서 그러니 잘 먹고 건강이나 챙기라는 잔소리도 빼먹지 않습니다.

한 방 먹은 것 같은 멍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정말 그럴까?

내가 식물인간이 되어 눈동자도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되어도

숨만 쉰다는 이유로 나에게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나는 아내의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 지금은 멀쩡하니까 저렇게 말하는 거지 정말 그 상황이 되면

달라질 게 뻔하다며 크게 마음에 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아내의 말과 행동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향한 말과 행동뿐 아니라 내가 신경 쓰지 않는 시간에

일어나는 아내의 모습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생각보다 바쁘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같이 육아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내가 육아와 가사에 보내는 시간보다

세 배는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당시 나는 대학원 생이었고, 아내는 프리랜서로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둘 다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함께 집에 있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나는 필요할 때면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내는 아무리 바쁜 상황에서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마무리 짓고 다음에 할 일까지 끝내고 나면 조용히 아이를 돌보는 일에 매진합니다.

그 과정이 이어지는 동안 한 번도 나에게 어떠한 도움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말에 조금씩 믿음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외면하고 혼자 지낼 땐 알 수 없었던 아내의 마음 씀씀이가

관심을 갖고 살펴볼수록 진중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부끄러워졌습니다.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고 내 실수도 아내 탓으로 넘기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내가 힘들까 봐, 내가 무너질까 봐 염려와 사랑으로

말없이 스스로 견뎌낸 아내의 시간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눈에 띄기 시작한 모습은 더 큰 시선을 지배합니다.

아내가 나를 위해 배려하는 행동에 감사하게 되는 반면에

조금 못마땅한 행동을 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시선의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우리 부부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변화가 아니었다면 우리 부부의 현재는 다른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하지요.

부부의 사랑도 공평하게 저울에 올리기 어렵습니다.

어느 부부든지 한쪽이 조금 더 기울어진 마음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있기에 사랑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받는 쪽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받고 있습니다.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여전히 투정도 부리고 떼를 쓰는 걸 보면 죽기 전에 철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내의 뜻에 따르는 결정이 늘었습니다.

내 생각보다 아내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그 결정에 따르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아내가 나를 위해 노력해 주었던 것만큼 나는 아내를 더 믿게 되었습니다.

변화는 지금껏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해낼 수 있게 만드는 힘,

사랑이라 부르지만, 그 안에는 노력이라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나는 요즘 아내의 감정을 배우고 있습니다.

함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얻습니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이 사람만 있다면 세상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루는 이런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다 버리면 뭐 먹고 사나 이 사람아."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지난봄, 우리 부부, 사진 찍을 때마다 꼭 한 발짝 뒤로 가는 마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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