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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Jan 14. 2022

남매의 색




"언니, 쟤들 언재까지 저래?"


아직 한 참 어린 남매를 둔 처제가 투닥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한탄 하 듯 물어봅니다.


"이제 시작인 걸, 뭐."


아내는 처제에게 마음을 비우라는 듯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을 남깁니다.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인이 된 큰 아들은 동생들과 관계랄 것도 없이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고

중학생인 둘째와 초등학생 막내는 싸울 때가 아니면 대화도 나누지 않습니다.


더 어릴 땐 싸우는 만큼 함께 놀 땐 정말 재밌게 노는 모습으로 흐뭇한 감정을 선물해주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자녀들 간의 관계 또한 성장하는 과정에서 급격히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몸도 마음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데 한 집에 살면서 항상 같을 수는 없겠지요.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며 사는 형제, 자매를 보는 일이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삼 남매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스무 살 큰 아들, 중 3 둘째 아들, 그리고 막내가 초등학교 5학년 딸아이입니다.

평범한 구성은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세 아이를 네 살 터울로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큰 아이는 홀로 사춘기를 견뎌 냈고, 둘째는 성인이 된 형을 바라보면서 사춘기를 건너고 있습니다.

막내는 네 살이나 어리지만 여자아이라 그런지 둘째 오빠를 종종 무시하곤 합니다.

애정 표현도 섞여 있는 것 같은데 사춘기 끝자락인 오빠와

사춘기에 이제 막 들어서는 막내딸의 관계는 고요하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형과 동생의 관계는 단순하면서도 공포스럽습니다.

한 때는 같이 게임도 하고 놀러도 다니던 사이였지만

형이 대학에 간 이후로 동생은 형에게 말도 하지 않습니다.

같이 한 방을 쓰고 있지만 아이들 방에서는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될 동생이 형보다 10센티는 더 키가 크면서

신체적인 역전 현상이 일어나자 형도 동생을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형이 용돈을 모아 산 옷을 동생이 마음대로 입고 아무 데나 벗어 놓자

한 번 대차게 붙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승자와 패자를 알 수 없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다만 형이 자기는 아빠 닮아서 키가 작은데 동생은 왜 혼자만 큰 거냐고 따져 물었던 적이

있던 걸 보면 작은 체구에 대한 불만이 있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조용히 "대신 너는 아빠 닮아서 잘 생겼잖아."라고 들릴 듯 말 듯 대답해 준 기억이 납니다.






얼마 전, 같은 빌라에 사는 아주머니께서 아내에게 푸념을 늘어놓으셨습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도 그렇게 서로를 아끼며 지내던 남매가

아들이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원인은 성인이 된 남매의 정치적, 사회적 색채가

정 반대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말씀하십니다.

민감한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당연한 갈등이기도 합니다.

남성은 남성적 이데올로기에, 여성은 페미니즘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대결 상대로 보거나 피해의식이 앞서게 된 것 같습니다.


무엇이 옳다는 이야기는 이번 주제가 아닙니다.

이 글은 남매의 색, 가족으로서 형제, 혹은 자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니까요.

'왜 이들은 그렇게 다투게 되는 것일까?'라는 처제의 물음이 나에게도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이들의 10년 전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먼저 형에게 동생에 대해 물었습니다.

10분 동안 쉬지 않고 불만을 털어내더니 후련한 듯한 표정으로 대화를 마무리했습니다.

며칠 후, 동생에게도 비슷하게 물었습니다.

이 녀석은 "몰라요."라는 말 왜에는 답을 하지 않습니다.

본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묵비권을 행사합니다.

원래 과묵한 아들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생각을 들쳐보기가 너무 힘든 녀석입니다.

오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막내딸에게 물었습니다.

귀찮아하면서도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오빠들의 성향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오빠들이 나갈 때마다 무슨 옷을 입고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매번 살피는 눈치입니다.


세 아이의 성격과 모습이 너무나 다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묘하게 달랐던 세 아이의 성향은 성장하면서 각자의 방향으로 세상을 보게 만듭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이기려 들었지만

이제는 조금씩 부딪히지 않는 방향으로 생활 반경에 변화를 주는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되면 가족보다 친구가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큰 아이는 그 단계에 들어가 있고, 둘째는 그 과정에 있음이 느껴집니다.

막내는 아직 엄마가 제일 소중하지만 셋 중에 가장 빠른 나이에 부모를 이기는 친구를 만들 것 같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한 집에서 살면서 어린 시절처럼 시끌벅쩍하게 지내긴 어려워 보입니다.

하나씩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고 난 뒤, 어쩌다 한 번 만나는 모임에서 서로의 외롭고 힘들었던 순간을 

털어낼 때가 되면 진지하게 속 깊은 이야기를 풀어 놓지 않을까 인생의 선배는 예상합니다.


물론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주변에는 결혼하고, 혹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사이가 좋지 않은 형제도 많습니다. 

새롭게 형성한 가족과 맞지 않거나 재산 다툼 같은 평범한 불화의 스토리는 널리고 널렸습니다.






같은 배에서 나고도 형제, 혹은 자매는 색이 다를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똑같은 존재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아이들의 다른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다를수록 사랑스럽고 특별합니다.

흐뭇한 마음으로 사랑하기도 하지만 아픈 손가락처럼 마음을 콕콕 찌르는 사랑도 있습니다.

다자녀를 둔 부모이기에 느낄 수 있는 행복입니다.


각자의 색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자신의 색이 침범당하는 현실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다툼은 자신의 색을 지키는 과정입니다.

일상적인 일이며 필요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때론 부모가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똑같지 않은 아이들이기에 부모가 대하는 태도도 조금씩 달라질 때가 있습니다.

부모로서 공평하게 대하려고 최선을 다해 보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저마다 피해의식을 조금씩 안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게 아니라고 설명해 주어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부모님을 향한 내 어린 시절의 불만의 원인을 부모가 되어서 깨닫게 됩니다.



그리운 그 시절



아무튼 세 남매의 관계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각자 살아내는 인생에 스스로 최선을 다하면 될 뿐,

사이가 좋고 나쁘고는 그다음의 일이니까요.


부모는 조용한 조력자입니다.

아이들의 이야기와 고민을 들어주면 됩니다.

아이들은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색을 밝히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만 너를 가장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너 만큼 사랑하는 다른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갑자기 막내 처제에게 해 줄 대답이 생겼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평생 투닥거려도 좋으니 언제나 서로를 마음에 담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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