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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Sep 23. 2024

소유냐 존재냐


존재를 증명하는 물리학적 요소가 두 가지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공간 안에서 2024년이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라도 성립하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지 않다는 의미겠지요.


존재한다는 것은 실체에 대한 증명입니다.

태어나고 존재를 인식하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현존재라 말합니다.

더 오랜 전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으니

시간과 공간에 사고(思考)를 더하면 존재는 확연히 드러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다 이해하지 못했기에 존재에 대한 해석이 사뭇 다를 수도 있습니다.

명문대 철학과를 나온 친구에게 "실존주의가 뭐냐?"라고 물었다가

"시끄럽고 술이나 처먹어."라는 대답을 들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냥 그 대답을 정답이라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삶은 그저 주어진 선물 같은 것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 '나'라는 존재가 이 글을 쓰고 있음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존재에 대한 가치를 잊어버리곤 합니다.

존재보다 소유가 조금씩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특별했던 어린 시절을 벗어날수록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를 통해 존재를 증명합니다.

재산, 학벌, 명예, 권력 등 우리가 추구하는 소유는 끝없이 이어집니다.

소유는 소비로 이어지고 또 다른 소유를 요구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도무지 채워지지 않습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저서 ‘소유냐 삶이냐’에서 소유는 인간의 정상적 기능이라고 설명합니다.

생존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생의 스승들은 풍성한 소유보다 풍성한 존재에 집중했다고 말합니다.

인생은 소유가 아닌 존재 자체를 특별히 여길 때 가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존재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소유가 없으면 불안합니다.

불안은 다시 내 존재를 평가 절하합니다.

비교가 일상이 되고 스스로 계급 안에 갇혀 삽니다.


우리나라가 십수 년 넘게 자살률 1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을 돌아보자면

존재 자체의 가치보다 소유에 대한 욕구가 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우리의 빠른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개인에 대한,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시선에 대한 변화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인생,

더 많이 갖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 관계,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여유,

이런 존재에 대한 깊은 경외심으로 우리 마음이 채워가면 어떨까요?


단순하지만 어려운 일입니다.

소유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내 존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럴 땐 존재와 존재를 잇는 특별한 마음을 살펴봅니다.

이를테면 '우정'이나 '사랑' 같은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존경' 같은 마음도 좋지만 가능하면 동등한 마음으로 나누는 감정에 집중합니다.

서로의 존재 가치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나로 인해 상대가 웃습니다. 나로 인해 상대가 행복합니다.

이것으로 내 존재의 의미를 채워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이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좋은 집, 좋은 차, 넉넉한 여유에 대한 고민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들이기도 하지요.

다만, 존재의 가치보다 소유에 더 의미를 두고 살지 말자는 작은 다짐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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