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하루

영화를 보며 걷기

by 류완


걷고 싶은 영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이윤기 감독의 2008년 작품 ‘멋진 하루’입니다. 두 남녀에게 일어나는 평범하지만 특별한 하루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단 하루의 일상이지만 영화는 많은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남녀는 바쁜 하루를 보냅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모든 영화가 그러하듯 갈등을 풀기 위한 과정이 순탄치 않습니다. 갈등의 요소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따라 걷는 길은 조금 불편하게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젊은 청년이 경마장을 내 집 드나들듯 하는 모습이나 350만 원을 받기 위해 옛 연인과 동행하는 설정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서로 다른 생각의 간격이 메워지면서 조금씩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두 주연 배우를 따라 걷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걸음의 힘이 느껴집니다. 두 사람의 인생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지만,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면서 편안해진 마음으로 결말을 맞이합니다.





주연 배우의 멋진 연기도 인상적이지만 하루 동안 지나친 풍경은 배우의 연기를 깊이 있게 만들어 주는 훌륭한 조연입니다. 이윤기 감독은 길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참 잘 살리는 것 같습니다. '여자, 정혜'에서 그랬고 최근에 봤던 '어느 날'에서도 그랬습니다. 영화를 보고 또 보면서 그 길을 함께 걷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잘 아는 골목이 나오면 마치 그곳에 함께 있었던 감정을 느끼며 두 배우의 발걸음을 따라 걸었습니다.


일 때문에 서대문 일대를 돌고 돌다 오래된 아파트를 발견하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영화 막바지에 등장했던 아파트였습니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린 시간에 주연 배우가 지인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장소였습니다. 흐린 날씨였지만 한낮에 만난 영화의 한 장면은 잊을 수 없는 일상의 기억이 되었습니다. 두 남녀는 지금껏 나의 일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 그 장소 앞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 순간 나는 영화 속으로, 영화는 내 삶에 들어온 것처럼 깊은 친밀감을 느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육교의 내리막길을 걸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특이한 육교였습니다. 육교의 내리막을 따라 걷는데 맞닿은 건물의 유리창에 두 남녀의 실루엣이 비췄습니다. 그림자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거리를 두고 걷는 두 젊은이는 답답하고 어두운 마음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그림자를 감싸는 햇살이 참 따듯하게 느껴졌습니다.


여자는 앞서 갑니다. 남자는 천천히 따라붙더니 내리막길의 반쯤을 돌아 어깨를 맞추고 나란히 걷습니다. 영화 내내 남자는 여자의 걸음에 발을 맞춰 걷습니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도 항상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립니다. 참 미워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내 앞에 주어진 환경 때문에 내 걸음을 걷기에도 여유가 없습니다. 영화가 계속될수록 남자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의 힘겨운 삶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잘 살기는 어려운 세상입니다.





몇 년 전 버스를 타고 가다 영화에 등장했던 육교를 발견했습니다. 한남동 어느 건물 앞 육교였습니다. 숨겨 둔 보물을 발견한 것 마냥, 들뜬 마음으로 돌아보며 시선에 담았습니다. 가끔 지나던 거리였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새로운 발견을 즐겼습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함께 있는 사람에게 영화 이야기를 했습니다. 관심 있게 듣는 사람도 있었고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내는 지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한다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언제 한 번 같이 걸어보자는 얘기에 긍정적인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변해있는 육교



최근에 그곳을 다시 지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육교가 조금 달라져 있었습니다. 길게 뻗은 내리막길이 사라지고 엘리베이터가 들어섰습니다. 누군가는 환영했을 변화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참을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을 들이켰습니다. 언젠가 주인공의 걸음을 따라 걷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시간만큼이나 공간도 기다려 주지 않음을 체험했습니다. 잘 가던 단골 음식점이 문을 닫으면 이런 기분일까 싶으면서도 항상 거기에 있으리라 생각하며 무심히 살았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됩니다.






‘멋진 하루’의 이야기는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젊음의 끝자락에서 보았던 주인공의 인생이 지금은 사뭇 다르게 다가옵니다. 등장인물의 대사를 빌리자면 주인공은 잘 사는 부모의 재산으로 사업을 벌였지만, 지금은 많은 것을 날려 버리고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때는 주인공의 삶이 한심하게, 혹은 불쌍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많은 실패를 보고, 듣고, 느끼며 사는 지금은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어떤 공감 비슷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생각해보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습니다. 지금도 경마장에는 실패를 만회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며 여전히 우리에게 350만 원은 포기하기 어려운 금액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수치로 기록하는 요즘, 최선을 다해 산다 하더라도 계산이 맞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낙인찍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결정하기에는 우리 인생이 그리 짧지 않습니다. 50대에도, 60대에도 새로운 도전에 성공했다는 고백을 듣습니다. 굳이 객관적 성공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한 시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내일이 기대되는 하루를 보냈다면 이 또한 멋진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화 속 남녀는 특별한 하루를 마치고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갑니다. ‘멋진 하루’의 이야기는 그들의 고된 일상 속에서 잠시 돌아보는 휴식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힘겹게 보내는 모든 날들이 ‘멋진 하루’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맑은 날이 없었는데 하루는 맑은 하늘이 우주 끝까지 닿을 것처럼 파란 속살을 드러냈습니다. 펜을 들어 그날의 기분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그 글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나에게 가장 멋진 하루는 언제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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