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Wild)
영화를 보며 걷기 두 번째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영화 와일드는 걷는 이야기에 충실한 영화입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주인공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스스로 해답을 찾기 위해 떠난 길은 4천 킬로미터가 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입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도보 여행길입니다.
영화는 셰릴 스트레이드의 에세이 ‘와일드’를 원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원작은 500페이지가 넘는 제법 두툼한 분량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흡수력 있는 문체와 그녀의 특별한 삶의 고백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시선을 붙잡아줍니다. 원작의 방대한 내용을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에 담아야 하다 보니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녀의 과거도, 그녀의 걸음도 온전히 따라가기에는 부족한 분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힘겨운 걸음의 과정은 충실히 담겨있기에 한 번쯤 찾아볼 만한 영화입니다.
맞지 않는 신발 때문에 발톱이 빠지고 피가 나는 장면으로 영화는 출발합니다. 장거리 도보 여행이 쉽지 않은 도전임을 시작부터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녀의 걸음을 따라갑니다. 영화 사이사이 그녀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걸음이 시작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과거, 그녀의 아픔에 닿아갑니다.
시작은 언제나 두렵습니다. 막내딸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준비하던 날이 생각납니다. 짓궂은 오빠들이 학교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 줄 아냐며 겁을 주자 입학을 하루 앞두고 가기 싫다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오빠들이 놀리는 거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막내가 학교에 적응하기까지 한 달 정도 애를 먹었습니다.
울음이라도 터뜨릴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울음으로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알아달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나 야생의 고요한 길 한가운데에서는 대성통곡을 하더라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길을 걷는 한 여성의 목소리는 아무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자신을 흔드는 불안한 마음에 속삭입니다.
‘언제든 그만둬도 돼.’
그녀의 걸음이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 역시 그녀에게 같은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천 번도 그만두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는 우리 앞에 놓인 길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독백처럼 들렸습니다.
걸음에도 경험이 필요합니다. 장거리 도보 여행이라고 머리에 떠오른 짐을 다 챙기다 보니 가방을 들지도 못하고 넘어집니다.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걸음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일단 무조건 챙기고 보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명절 때 부모님 집을 다녀오면 어머니는 무조건 손에 잡히는 것은 모두 싸주셨습니다. 사랑은 무조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거리 도보 여행에서 무조건은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요소입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이 있다면 버려야 할 것도 알아갑니다. 하지만 소유보다 버리는 일은 항상 더 어렵습니다. 주인공도 그렇습니다. 가방을 들지도 못하면서 영화의 중반부까지 쓰지도 않는 짐을 계속 가지고 갑니다. 도보 여행을 잘 아는 노인을 만나고 나서야 발톱이 빠진 이유와 버려야 하는 것들을 알아갑니다.
노인도 처음부터 잘 걷지는 않았을 겁니다. 자신의 경험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배웠을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보다 더 늦은 나이에 깨달았을 수도 있습니다. 노인은 자신의 경험을 주인공에게 알려주었고 주인공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한결 가벼운 걸음을 걸었습니다.
고통이 머리끝까지 차오를 때는 그 어떤 충고도 마음에 닿을 수 없습니다. 그녀도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스스로 고요한 길로 뛰어들었습니다. 무심히 건네는 위로는 때때로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나는 괜찮지 않은데 괜찮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듯 들립니다. 힘내라고 하는데 밥이나 사주면서 그런 말을 해야지 지나가다 무심히 던지는 한 마디는 약을 올리는 건 아닌지 의문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정말 위로가 필요할 때에는 신호등의 초록 불에도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쟤도 걸으라는데 이렇게 멈춰 설 수는 없잖아.’
한참을 걷고 나서야 비로소 낯선 이들의 위로가 들려옵니다. 걷고 또 걸으면서 그녀는 자신을 향한 위로와 응원에 귀를 열게 됩니다.
“뭘 선택하든 자책하지 말아요.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것이니까.”
아마도 그 길을 걷는 이들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평범한 위로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열리고 나면 나만을 위한 특별한 위로처럼 들립니다. 사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위로는 진지합니다. 퍼시픽 크래스트 트레일은 동네 마실 가는 수준이 아니라 생존과의 싸움입니다. 그녀도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험자의 충고를 따라 경로와 목적지를 변경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의 누군가에 의해 조금씩 움직이며 살고 있습니다.
언제든 포기할 수 있는 길과 한 번 걷기 시작하면 포기할 수 없는 길은 너무나 다릅니다. 걸음이 잔인한 현실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 걸음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와일드는 실제 있었던 일을 담고 있음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피곤한 걸음을 함께 걷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실화라는 전제 조건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욱 불편한 것은 그녀의 걸음이 아닙니다. 그녀의 걸음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과거의 이야기는 4천 킬로미터가 넘는 야생의 거리보다 처참하고 더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녀에게 야생(wild)은 어디였을까요? 무수히 실패했던 사람들과의 관계였을까요? 아니면 바람만이 나의 걸음과 동행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었을까요?
영화를 다 보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걷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걷고 싶지 않게 만드는 영화 같았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와는 정반대의 감정으로 영화를 마쳤습니다. 와일드의 주인공과 멋진 하루의 두 남녀는 모두 힘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픽션과 논픽션일 것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굳어지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픽션은 논픽션을 이길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보다 잔인한 허구는 없는 것 같습니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의 끝 '신들의 다리 (Bridge of the Gods)'
그녀의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그녀의 현실은 동화 속 주인공처럼 해피엔딩으로 향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부러움과 존경도 받고 있습니다. 그녀가 찾은 길이 정답처럼 여겨집니다. 과연 그럴까요?
'슬픔의 황야에서 자신을 잃고 나서야, 나는 숲을 벗어나는 길을 찾아냈다.'
그녀는 고백에 따르면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 비로소 자신이 걸어야 하는 길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성공이 쏟아지는 삶을 살아도 비바람은 불고, 고통과 죽음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없습니다. 그녀는 과거의 숲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행복할지라도 마냥 아름다운 일만 찾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불안과 고통이 밀려올 때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를 찾은 것 같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말입니다.
'흘러가게 둔 인생은 얼마나 야생적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