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액세서리를 꼽으라면 단연 음악입니다. 걷기 그 자체라고 느껴질 정도로 잘 어울립니다. 음악의 리듬은 발걸음을 타고 오릅니다. 장르에 따라 보폭도 달라집니다. 똑같은 풍경도 수채화처럼 느껴지더니 음악을 바꾸면 추상화가 됩니다.
걸을 때 음악을 즐겨 듣습니다. 때로는 음악을 듣고 싶어 걸음을 걸었던 적도 많았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이어폰을 꽂고 공원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걸음이 더 좋았는지 음악이 더 좋았는지 우열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음악을 들으며 걷는 일은 즐겁습니다.
음악은 운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낮추는 데 효과적입니다. 음악을 들으며 시속 6km로 걸으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이 평소보다 60%가량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굳이 연구 결과를 확인하지 않아도 음악을 들을 때와 듣지 않을 때의 걸음의 차이는 일상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습니다.
이동 중에 음악을 듣는 행동은 이제 특별한 취미가 아닙니다. 핸드폰에 음악을 듣는 기능이 내장되고 무선 이어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누구나 편리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걸으며 듣는 음악이 무조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폰의 장시간 사용은 귀의 압력을 높이고 청력 손상을 가져올 수 있으며, 무엇보다 외부 소음의 차단으로 인해 다양한 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안전한 음악 감상을 하라면 무언가 어색하긴 합니다만 실외에서 즐기는 음악 감상은 차단된 공간에서 즐기는 음악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있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본다면 우리가 느끼는 위험은 음악 자체가 아닌 단절에 있습니다. 길을 나서는 순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량을 높이는 행위는 음악에 집중하고자 하는 의도만이 아닌 세상과의 단절도 의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소리에 집중하는 행위는 외부의 소리를 거부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거부하는 소리는 대부분 도시의 소음입니다. 자동차, 지하철, 공사장, 사람들의 이동과 대화에서 나오는 소음을 즐겁게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크게 의식하지는 않더라도 도시의 소음은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퇴근 시간이 길어지면 몸의 피로뿐 아니라 정신적 피로도가 증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018년 독일의 가디언지는 마인츠대 연구진의 발표를 인용해 환경 소음이 다양한 성인병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고 언급했습니다. 소음 대신 음악의 볼륨을 높이는 선택이 나름 타당해 보입니다.
도심의 소음은 제법 높은 데시벨을 형성합니다. 평범한 거리의 소음도 60 데시벨이 넘습니다. 에어컨 실외기의 소음과 비슷합니다. 번화한 거리나 공사장이 가까이 있다면 80 데시벨이 넘습니다. 이 소음을 차단하려 할수록 플레이어의 볼륨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스마트 기기 중 일부는 음량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리면 경고 메시지가 뜨기도 합니다. ‘높은 음량으로 오랫동안 들으면 청각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경고 이상의 볼륨을 선택하게 되면 거리는 사라지고 음악만 남습니다. 거리는 콘서트장이 아닙니다. 음악에 환호할 수도 없고 눈을 감고 걸을 수도 없습니다. 싫든 좋든 거리에서 듣는 음악은 소음과 풍경과 걸음과 같이 가야 합니다.
걸음이 음악과 조화가 되려면 단절이 아닌 ‘함께’가 되어야 합니다. 걸음과 음악과 풍경이 하나의 리듬을 탈 때 더 좋은 걷기가 됩니다. 시선은 주변 풍경을 향하고 적절한 볼륨을 유지하면서 거리의 리듬을 타는 것이 좋습니다. 걸으며 듣는 음악은 음악 감상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지루한 풍경에 색을 더해 주는 도우미 같은 역할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걸음도 의식하고 교통의 흐름에 맞추며 걷다 보면 지루함을 날리고 더 오래 걸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흐르는 풍경에 시선을 더하기에 걸음의 맛이 풍성해집니다.
걸을 때 듣기 좋은 음악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걸음과 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느낌의 곡들을 골라 보았습니다.
빠르고 힘 있게 걸을 때는 로큰롤이 제법 잘 어울립니다. 강렬한 헤비메탈보다 경쾌한 리듬의 락(Rock)을 추천합니다. 반 헤일런(Van Helen)의 ‘Jump’는 경쾌한 건반 사운드가 매력적이고, 넥스트의 ‘Hope’는 기타의 전주와 베이스 리듬이 걸음에 힘을 더합니다.
좀 더 편안히 걷고 싶을 땐 팝이나 포크 스타일을 추천합니다. 마이클 부블레 (Michael Bublé)의 ‘Everything’, 제이슨 므라즈(Jason Mraz)의 ‘I’m yours’,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걸음을 더 편안하게 만듭니다.
그러고 보니 바람이 주제인 노래들은 걸음과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나얼의 ‘바람기억’,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홍대광의 ‘바람의 언덕’이 떠오릅니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들으면 이보다 걸음의 감성을 잘 살리는 노래가 없는 것 같습니다.
홍대광 '바람의 언덕', 김광석 4집 수록곡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이소라 6집 수록곡 '바람이 분다'
때론 가사가 없는 연주곡도 좋습니다. 걸음에 더 집중할 수 있고 생각을 풍부하게 합니다. 기타리스트 오시오 코타로의 ‘Dreaming’, 재즈 피아니스트 하쥬리의 ‘Santa Fe’, 스티브 바라캇(Steve Barakatt)의 ‘Day by day’를 추천합니다. 김광민의 ‘학교 가는 길’은 꼭 학교 갈 때가 아니라도 걸음을 즐겁게 합니다.
걸음의 속도에 따라 듣고 싶은 음악도 달라집니다. 차분하게 생각을 달래며 느리게 걸을 땐 음악도 감정을 담아 천천히 걸어주어야 좋습니다. 앙드레 가뇽(André Gagnon)의 피아노 연주는 느린 걸음과 잘 어울립니다. 그중에서도 ‘첫날처럼 (Comme au premier jour)’은 가장 사랑하는 걸음의 친구입니다. 수많은 감동을 남겼던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의 곡, 영화 ‘러브 어페어(Love Affair)’에 등장하는 피아노 테마 역시 비슷한 감동을 주는 곡입니다.
걸음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 장르를 추천하라면 단연코 클래식(Classic)입니다. 클래식 마니아여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클래식 문외한에 가깝습니다. 다만 걸음과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데 이보다 좋은 소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은 음악으로 풍경을 느끼는 대표적인 곡입니다. 너무 경쾌하다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의 1악장을 추천합니다. 강렬한 3악장을 더 좋아하지만 걸을 때는 차분하고 잔잔한 1악장이 어울립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는 그룹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의 가사로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곡입니다. 67년도 스웨덴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배경음악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면 걷는 기분을 더하지만, 영화의 비극적 결말을 따라가면 조금 우울할 수도 있습니다.
풍경과 음악이 아름다운 영화 '엘비라 마디간'
고전일수록 걸음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헨델의 ‘라르고(Largo)’, 요한 파헬벨의 ‘카논(Canon)’이 그렇습니다.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중 2악장은 꼭 한 번 걸으며 듣기를 추천합니다. 두 대의 바이올린이 다른 선율을 타고 흐르지만 묘한 긴장감과 어울림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마치 편안한 걸음과 시선을 따라 흐르는 풍경이 두 대의 바이올린으로 묘사되는 것 같습니다.
걸음에 친구가 될 만한 음악들을 골라 보았습니다. 화려한 히트 곡은 아니지만 대부분 어디선가 들어 봄 직한 편안한 음악입니다. 더 좋아하는 음악들이 있지만, 걸을 때 가장 좋은 친구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볼륨을 올리지 않아도, 음악에 집중하지 않아도, 흐르는 풍경에 시선을 모아도 음악은 감정을 타고 흐르며 편안한 발걸음을 유도합니다.
음악을 듣기 위해 걸음을 나서 봅니다. 편안한 복장에 번잡하지 않은 길을 찾아갑니다. 공원 산책길이나 가로수가 풍성한 인도를 좋아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잡다한 생각들은 버리고, 음악으로 빈틈을 채우는 걸음이 제법 즐겁습니다. 시선은 영상을 만들고 음악은 OST가 됩니다. 들으며 걸었을 뿐인데 한 편의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음악과 함께 걷는 길은 이처럼 특별한 감동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산책로를 걷는데 어르신 한 분이 트로트를 크게 틀고 걸으십니다. 같은 방향으로 걷다 보니 그 소리가 예민하게 들렸습니다. 처음엔 짜증스럽게 느껴졌는데 하마터면 방향을 틀어 멀어지는 어르신을 따라갈 뻔했습니다. 묘한 중독성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을 타고 넘는 리듬은 장르를 불문합니다. 걸음에 힘을 주는 음악 장르가 따로 정해진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거리를 오고 가는 낯선 이들의 이어폰에는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수많은 플레이리스트에서 내가 즐겨 듣는 곡 한 곡만 나와도 반가울 것 같습니다. 함께 공존하는 공간에서 듣는 음악이라면 숨겨두기보다 서로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내 걸음도 아무도 모르게 꽁꽁 숨겨둘 수 없듯이 말입니다. 취향이 소통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열린 공간은 항상 열어 두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