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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Jan 25. 2021

어머니의 신장



고3 때였습니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부모님이 우리 형제를 불렀습니다. 이야기는 다소 복잡하면서도 간단했습니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청년부 누나를 위해 어머니께서 신장을 기증하기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모님은 한참 동안 형과 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누나가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다는 것과 이미 누나의 아버지에게 한 번 기증을 받았지만, 결과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식 적합 판정을 받았기에 본인의 기증을 미룰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궁금증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왜?’라는 질문이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친절하고 착한 청년부 누나였지만 그 순간에는 모두가 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부모님의 모든 이야기가 나에게는 그저 너의 인생은 알아서 하라는 대답처럼 들렸습니다.


형과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때 나는 왜 하필이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고3 때 인지 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과연 부모님은 내 삶에 관심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런 언급을 할 순 없었지만, 부모님의 통보는 고3을 보내는 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결정이었습니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넘어가는 첫 세대였습니다. 당시 우리는 수능을 두 번 봤는데 첫 번째 수능이 8월 말, 여름 방학이 끝나고 바로 시험을 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름 방학을 시작할 무렵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나는 그곳을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독서실과 집을 오가면서 고3으로서 해야 할 일에 충실한 한 달을 보냈습니다.


더 어린 시절부터 막내아들은 임시 엄마의 역할을 훈련해 왔습니다. 덕분에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 밥통과 씨름하며 밥을 지어야 했고, 이런저런 반찬도 만들었습니다. 때로는 핑계를 대면서 독서실에 틀어박힌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오면 눈에 보이는 청소 거리와 쌓여있는 설거지거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대략 한 달 정도 어머니는 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여름 방학을 마칠 때 즈음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반가움보다는 안쓰러움으로 어머니를 대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나는 고3이고 어머니는 나를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기대치를 한껏 낮추고 어머니를 맞았습니다.


수능을 일주일 정도 앞둔 날이었습니다. 목욕을 하시던 어머니는 저에게 수건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수건을 건 내 드리려 열어 본 문틈으로 어머니의 수술 자국이 보였습니다. 오른편 옆구리에서 대각선으로 그어진 두툼한 수술 자국은 배꼽을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습니다. 제법 큰 수술 자국에 아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 좀 가리지 그래.”


“미안해”


어머니의 대답이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수술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가족에게 불문율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누구도 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습니다. 딱히 자랑스럽거나 대단한 희생처럼 이야기한 적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청년부 누나가 여전히 투석과 치료를 병행하면서 생과 사를 나누는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짐작합니다.


2년 뒤 군에 입대한 아들은 자대 배치 후 야간 교육이 끝나고 침상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취침 시간 후에 이뤄지는 야간 교육은 흔히 말하는 구타, 얼차려, 폭언이 이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힘들고 힘들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불침번 선임이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입대 후 처음 듣는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참 멋진 가사였습니다.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친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없었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 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그 순간 어머니의 한 마디가 떠올랐습니다.


'미안해.'


내 기억 속 어딘가에서 들리는 소리는 어머니의 한마디였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침낭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든 이등병은 다음 날 저녁에도 교육을 견디어 냈고 똑같은 저녁을 맞이했습니다.


내일은 없을 것 같았던 군 생활도 아무튼 견디어 냈습니다. 몇 달을 그렇게 보내고 후임병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군 생활에 여유도 생겼고 선임으로 다른 환경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힘들었던 이등병의 시간은 군 시절 한 편에 접어 둔 추억으로 밀려났습니다.


어머니의 신장을 받았던 청년부 누나는 이후 10년을 더 살았습니다. 고맙게도 내 결혼식 때는 직접 십자수를 새긴 고급 원목 벽시계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우리 부부의 결혼 날짜가 새겨진 시계는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단 하나의 시계입니다. 그러나 누나는 우리 부부의 첫 아이가 태어나기 한 달 전 잠을 자다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누나의 10년을 위해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 그 시간을 불만 가득히 채웠습니다. 돌아보면 나는 잃은 것도 없고, 나눈 것도 없음에도 유독 혼자만 손해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그 시간을 진한 희생으로 채운 주변 사람들의 기억은 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기적으로 살아온 사람이 변화되어 나누는 삶을 사는 이야기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과연 무엇으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켰을까요? 훌륭한 강연, 책, 영화나 종교 활동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문화 활동이 한 사람의 성장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선한 영향력은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보고, 듣고, 느낀 사랑의 체험 속에서 타인을 위해 다가가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타인의 아픔에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마음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 이끄는 힘은 고3 때 보았던 어머니의 수술 자국이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지금은 태워져 어딘가에 묻혀 있는 어머니의 한쪽 신장을 마음에 담고 살자,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살아갑니다. 내 몸의 한쪽을 내어줄 만한 용기는 없을지라도 내 마음의 일부는 나누며 살자고 마음을 다지며 살아갑니다.


사랑이 수많은 나의 허물을 덮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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