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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Jan 02. 2021

"봤구나?"


아내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인적이 드문 보행로를 따라 편안한 걸음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맞은편에서 키가 크고 늘씬한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스쳐 지나갈 때까지 아무런 의식도 하지 않았는데

여성이 아내의 왼쪽을 스쳐 지나가자마자 아내와 내 눈이 마주쳤습니다.


"봤구나?"

"으? 응? 뭘?"

"뭘 또 보고도 못 본척해. 아주 대 놓고 쳐다보시던데."

"아니 내가 뭘 봤다고 그래."

"다 늙은 아저씨가 그렇게 쳐다보면 징그러워요."


평소에 이런 시비를 건 적이 없는 아내가 갑자기 나의 시선을 문제 삼습니다.

억울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기도 해서 따지듯 하소연을 풀었습니다.


"뭘 봤어야 봤다고 하지. 내 눈동자에 내가 본 게 그려져 있어? 왜 생사람 잡고 난리야?"


대답은 않고 살짝 미소만 짓는 아내가 얄미워서 한 마디 더 던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보다 보면 시선이 지나칠 수도 있지. 내가 그럼 눈 감고 다닐까?"

"오~ 보긴 봤구나?"


아, 이 여자 경찰이나 검사를 했어야 했습니다. 유죄율 99%가 넘는 경이로운 수사기법입니다.

끝까지 잡아떼거나 묵비권을 행사해야 했는데 한마디 실수로 무죄는 물 건너갔고

잘해야 집행유예나 벌금형을 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 저렇게 예쁜 여자가 멋지게 차려입었는데 안 봐주면 섭섭하지.

그래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면 변태 같아. 좀 자중해요."


KO입니다.

화를 내면 지질한 남편이고, 인정하면 변태입니다.

한 숨을 크고 쉬고 나니 나름 상황 파익이 되었습니다.


선수 교체,

나도 변호사를 선임했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공권력에 맞서 변론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당신이랑 걸을 때 전방 10미터 이내에서 자기 오른쪽 눈밖에 안 봐.

다른 곳을 본 적도 없어요. 걷다 보면 시선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는 거지.

당신은 남편을 그렇게 파렴치한으로 만들어야겠어?"


이 정도면 변론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생각지도 못한 공격 지점을 찾아냈습니다.


"나랑은 다르네? 나는 나란히 걸어도 당신 표정이 다 보이는데.

한쪽 눈 밖에 안 보이면 너무 무신경한 거 아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최후의 변론을 마쳤습니다.


"그만 쫌, 그 여자 별로 이쁘지도 않던데."


판결은 벌금형,

비상금을 털어 저녁값을 지불했고 애피타이저로 호떡까지 뜯어냈습니다.

아무 말도 믿어주지 않던 아내는 '당신이 훨씬 이쁘다'는 아부성 발언은 은근히 믿고 싶은 눈치입니다.


안 믿으려면 끝까지 믿지 말던가, 아님 처음부터 믿어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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