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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Mar 07. 2021

물질명사 추상명사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반 강제 홈 스쿨링을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해도 따라갈까 말까 하는데 학원도 안 다니는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 리 없습니다.

두 달만에 간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성적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누굴 닮아서 이리 멍청할까 생각해봤는데 내가 원인일 확률이 50%라 암말 안 하기로 했습니다.


식탁에 앉은 엄마와 딸은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영어입니다.

엄마는 명사에 대해 열심히 설명합니다.

영문법인가 봅니다.

명사는 5가지가 있답니다. 뭐였지? 갑자기 떠올리려 하니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보통명사, 고유명사, 집합명사, 물질명사, 추상명사....

아내의 설명에 나 역시 귀가 쫑긋 세워집니다.


단어 하나를 제시하면 명사의 뜻과 종류를 맞추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rice"

"쌀"

"무슨 명사야?"

"보통명사?"

"아니 물질 명사야"

"왜요? 셀 수 있잖아요. 한 톨, 두 톨하고......"

"네가 오늘 먹은 밥이 모두 몇 톨인지 알고 있어?"

"한 300톨 먹었을걸요?"

"한 숟가락만 떠도 100톨은 넘어. 넌 셀 수 없는 거야."

"와! 많이도 먹었네. 그래서 살이 찌는 건가?"





두 여자의 대화를 듣다 보니 짐 캐리의 영화 덤 앤 더머가 생각납니다.

다행입니다. 내가 멍청함의 원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mouse"

"컴퓨터 움직이는 거?"

"아니 동물 중에서."

"쥐?"

"맞아. 무슨 명살까?"

"추상명사?"

"아니 동물 이름이 왜 추상명사야?"

"셀 수 없으니까요."

"왜 셀 수가 없어?"

"쥐를 어떻게 세요. 징그러워서 볼 수도 없는데......"


나는 빵 터졌는데 아내는 심각합니다.


"장난해? 지금 농담하는 시간이야?"

"엄마는? 나보다 더 쥐를 싫어하면서......"


한 참을 웃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아이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잘 어울리는 오답을 찾아내지 못할 겁니다.

이쯤 되면 정답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음엔 어떤 오답이 나올지 기대가 부풀어 오릅니다.


아이의 창의적 대답을 놓칠 수가 없어 기록에 남깁니다.

오답이 반가운 아이,

초등학교 5학년 문 턱에서 좌절하고 있는 막내딸의 이야기입니다.








정확하고 원활한 소통을 위해 문법을 공부합니다.

글의 법칙을 공부해서 쉽고, 빠르고, 정확히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문법에 맞지 않는 글은 쉽게 버려지곤 합니다.

하지만 오답 속에도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 조심스럽게 들어보면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언제나 법칙 안에 존재하는 것 같지만 법칙을 벗어나 있는 삶의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돌아보면 내 삶도 잘 한 일보다 잘 못한 일이 더 많았고

무난한 과정보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만들어진 결과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정답을 찾기 위해 애를 쓰는 아이들의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살아보니 꼭 정답만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문제 앞에서 너무 깊이 고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틀려도 괜찮으니 그저 당당하고 용기 있게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쓰고 보니 열두 살 아이에게만 남기는 말이 아니네요.

비슷한 정신연령으로 중년을 살아가는 나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이 글을 읽고 피식 웃은 분들에게도 같은 위로와 응원이 전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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