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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May 15. 2021

파콩라면


11시가 다 되어갑니다.


이빨 닦고 자라고 했더니 막내딸이 배가 고프다고 칭얼댑니다.

토닥여서 재울 나이도 아니고 시끄럽다고 빨리 자라고 하니 투덜거리며 입을 삐죽 내밉니다.

학교도 안 가는 요즘 좀 늦게 자도 괜찮겠지 싶어 먹고 싶은 것이 있나 물었습니다.

막내딸은 아빠가 끓여주는 라면이 먹고 싶다고 합니다.

귀찮다고 과자나 조금 먹다 자라고 했더니 오늘은 꼭 라면을 먹어야 한답니다.

그것도 아빠가 끓여주는 라면......

이유를 물어보니 얼마 전 밤늦게 아빠 혼자 끓여 먹던 라면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는 고백입니다.


곰곰이 그때의 레시피를 꺼내어 봅니다.

라면은 좋아하지만 위장이 연약한지라 맵지 않고 시원한 국물을 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500미리 생수병 한 통 가득 물을 올리고 가스 불을 켰습니다.

콩나물 한 줌을 끓기 전에 넣고 수프를 미리 3분의 2만 넣습니다.

물이 끓어 오르기 전에 파를 다듬습니다. 

콩나물과 함께 먹기 좋게 채칼로 길고 가늘게 채를 칩니다.

물이 끓어오르면 면을 넣고 면이 풀어질 때를 기다립니다.

풀어졌다 싶으면 파를 넣고 면과 함께 여러 번 저어줍니다.

시원한 국물을 위해 계란은 넣지 않습니다.

불을 끄기 전 후추 한 번 톡 털어 넣고 저어줍니다.





그릇에 담은 라면과 김치를 식탁에 올려 줍니다.

이미 젓가락을 두 손에 담은 아이의 귀찮은 부탁이 이어집니다.


"아빠도 여기 앉아요. 나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요."


꼬박꼬박 엄마 아빠에게 존댓말을 하는 딸이지만 이상한 부분에서 버릇이 없습니다. 

명령인지 요청인지 모를 애매한 조건에 그저 따를 뿐입니다.


"일단 한 입 맛보고 평가를 해 줄게요."


아니 내가 먹어달라고 조른 것도 아닌데 갑자기 맛 평가를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먹고 자면 안 돼?"

"조용히 먹으면 소화가 안돼요. 말을 하면서 먹어야 맛있어요."


바보 같지만 맞는 말입니다.

정말 쉴 새 없이 먹고 쉴 새 없이 말을 합니다.


"국물이 정말 시원해요."


시원하다는 게 뭔지는 알까요?

목욕탕의 40도 뜨거운 열탕이 시원하다는 의미를 아직도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면도 잘 익었고, 콩나물이 정말 잘 어울려요."

"평가는 그만해. 네가 백종원이냐?"


라고 한마디 했지만 내 말은 귀담아듣지 않고 있습니다.


"음, 좋아요. 정말 맛있어요. 파와 콩나물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이 라면은 편의점에 론칭해야 돼요. "

"숨은 좀 쉬면서 말해라. 말하면서 삼키다 숨 넘어가겠다."


후루룩, 후루룩, 면을 들이켜는 소리가 이어지던 딸은 놀라운 발견을 한 것처럼 외쳤습니다.


"파와 콩나물이 섞였으니 파콩라면!!! 이건 파콩라면이라고 이름 지으면 되겠네."


오래전부터 개인의 취향에 맞춰 먹던 레시피에 이름이 지어지던 순간이었습니다.

파콩라면, 내 주된 라면 레시피는 막내딸의 시식과 함께 이름을 찾았습니다.

편의점에 론칭될 일은 없습니다. 

수많은 라면 레시피가 공개된 요즘 딱히 특별한 조리법도 아닙니다.

그래도 막내딸이 붙여준 내 라면 레시피가 싫지만은 않습니다. 


"아빠가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끓이지 않냐?"


한 번으로 끝내야 했는데 아빠는 과한 욕심으로 한 번 더 칭찬을 요구했습니다.


"뭐 이 정도는 요즘 다들 끓이지 않아요? 

오늘 TV를 보는데 백종원 아저씨가 맛 평가를 하는 거예요.

나도 한 번 해 보고 싶었어요. 나도 꽤 잘하지 않아요?"


내 라면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애들은 별 쓸데없는 걸 잘도 따라 합니다.

"그래 잘하더라. 먹고 싶어 죽일 뻔했다." 


한 마디 남겨주고는 설거지 해 놓고 자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습니다.

"맛있게 먹어 줬는데 설거지는 아빠가."

"시끄럽다."  


좋은 아빠 되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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