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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강 Feb 09. 2021

낡은 권위를 넘어
내일로 나아가는 힘

여성과 영화의 아주 특별한 시너지


1977년, 미국에서 아동을 여러 차례 강간한 후 유럽으로 도피한 남자가 있다. 그는 대략 40년 동안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회피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남자의 이름은 로만 폴란스키, 그는 지난 2월 23일 신작 <언 오피서 앤드 어 스파이(An Officer and a Spy, J’accuse)>로 프랑스의 세자르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단은 작품이 창작자의 비윤리적 행위와는 별개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그와 그의 작품을 영화제 수상 후보로 지정한 후 벌어진 논란에 책임을 지겠다며 전원 사퇴했다.


아동 성범죄자에게 프랑스 영화계 최고의 권위를 안겨준 사건은 ‘창작인과 창작물을 분리해서 소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기생충>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은 국내 영화계 또한 이에 대한 대답을 외면할 수 없다. 2017년에 영화계 ‘미투(#MeToo, 나도 고발한다)’가 여성 영화와 여성 영화인을 향한 관심을 촉발하면서, 극장의 주요 소비층인 2~30대 여성이 여성 영화인의 경력 확장과 여성 주연의 영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소비자가 여성 인물 중심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응원하는 행태는 2017년 이후 문화예술계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젠더 현상이다. 배우 한지민, 라미란, 이성경을 전면에 내세운 <미쓰백>과 <걸캅스>는 여성 관객의 ‘영혼 관람(극장에 가지 않고 표만 사서 작품을 응원하는 행위)’로 주목을 받았다.


<미쓰백>은 제작 및 배급 과정에서의 성차별과 불리한 상영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70만 명을 끌어 모으며 손익 분기점을 넘겼다. <걸캅스>는 성범죄를 해결하는 여성 형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이유로 개봉 전부터 비난에 휩싸였지만, 개봉 이틀 만에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제치고 15.7%로 좌석판매율 1위를 달성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들은 앞선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분리해서 소비할 수 없다’를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박우성 평론가가 ‘폴란스키 영화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듯이,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영화에 접근하는 관객에게 성범죄자의 작품은 완전히 배제되어야만 한다.


그의 창작물을 소비하는 일이 성범죄자를 사회적으로 용납하는 일과 동일하다고 해석할 때, 대중은 가해자를 제도적으로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성범죄를 근절하고 피해자를 보호할 수 없다고 믿는다.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는 창작자의 창작물을 영화계에서 제거함과 동시에, 창작자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예술 활동을 이어갈 수 없도록 문화적으로 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창작자의 윤리적 문제를 중하게 고려할 것이 분명한 여성 소비자는 그러므로 창작물만을 응원하지 않는다. 이들은 또한 여성 영화인의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때로는 무조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영화적 체험을 넓혀줄 새로운 영화의 탄생을 기대한다.



여성 영화인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것은 한국 영화사에서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는 남성 감독이다. 성인지 감수성이 보다 미흡한 남성 감독의 영화에서 여성 관객은 불편함을 느낀다.


연쇄 살인마인 북한의 고위인사를 다룬 박훈정 감독의 <VIP>는 등장하는 여성 인물이 대부분 살해되거나 폭행당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남성 출연진을 주축으로 한 남성 중심의 서사가 흥행 공식처럼 반복되어 관객에게 피로감을 준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폭력, 범죄 등의 소재가 남성 중심적 서사와 결합된 작품의 양산이 한국 영화계의 남초 현상을 지속시켰음을 지적하는 근거로 사용되곤 했다.


남성 중심의 한국영화에 대한 피로감은 다채로운 작품을 보고싶다는 욕구와 연결되어 있다. 더불어, 극장 문화를 주도하는 여성 집단은 성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답습한 작품들이 자신을 순결한 피해자나 요사스러운 악역으로만 취급하는 데 분노를 느낀다.


다양한 영화를 보다 풍요롭게 감상하고 싶다, 그리고 더는 스크린이 여성을 편협하게 재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요구의 목소리.


이를 만족시킨 것은 그동안 주류 밖에 존재해왔던 여성 감독의 여성 영화였다.





2019년은 여성 감독이 한국 독립영화계를 이끌었던 해다. 국내외 영화제 46관왕의 영예를 껴안은 <벌새>의 김보라 감독, <우리들>과 <우리집>을 연이어 제작하며 여성 감독으로서 작가론적 가능성을 드러낸 윤가은 감독, 여성이 자신의 몸을 대하는 방식을 의미 있게 다룬 <아워 바디>의 한가람 감독은 ‘여성이 만드는 영화는 특별한가?’라는 의문에 각자의 작품으로 답을 내놓은 격이다.



손희정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이들은 “어떤 감독이 만든 어떤 영화는 확연하게 여성이 아니라면 만들지 못했을 것처럼 다가온” 여성 영화다. 여성 감독의 여성 영화가 한국 독립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는 여성 감독이 한국영화의 미래를 이끈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그러니 더 많은 여성 영화가 제작되고, 소비되고, 주목받아야 한다.


여성주의적 콘텐츠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영화 외에도 도서, 방송, 게임 등 다양한 분야로 가 닿고 있다. 여성을 위한 콘텐츠를, 여성 영화를 소비하고 주목할 관객은 준비되어 있고,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여성 감독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여성 영화인의 제작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영화진흥위원회 산하의 한국영화성평등소위원회에서 2019년에 실시한 성평등 정책 연구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개봉한 1433편의 한국영화 중에서 여성 제작자 비율은 11.2%다. 프로듀서는 18.4%, 감독은 9.7%, 각본은 17.4%, 촬영은 2.7%다.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인 불평등한 제작환경에서, 여성 영화인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혐오에 고통받고 있다. 이렇듯 제작환경의 젠더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여성 영화인의 안전한 노동을 보장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영화성평등소위원회와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운영을 지원하고, 성평등을 위한 영화발전기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2020년 성인지 예산서에 따르면, 문체부의 영화발전기금은 모두 간접목적사업을 위해서다.


성평등을 1차적 목적으로 설정하여 적극적으로 여성을 지원하는 직접목적사업과 달리, 간접목적사업은 성평등을 1차적 목적으로 하지 않으나 간접적으로 성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을 말한다. 성인지 예산에 포함되었으나 성평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체부의 영화발전기금이 여성영화인의 제작환경을 개선하는 데 실질적인 이득이 될 것인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현 정부의 영화정책은 성불평등 문제를 “한국영화산업의 성장과 발전에 뒤따르는 하위목표, 다양성 이슈 중에 하나, 여러 가지 세부 계획 중 일부”로 이해하고 있다. 김선아. 2020. “성 주류화 전략의 관점에서 바라본 성평등 영화정책.”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20(2): 288-299.


여성 영화인의 영화가 한국의 다양성 영화 개진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젠더 이슈와 다양성 이슈를 분리하여 영화정책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따라서 문체부와 영진위는 성인지 예산안의 영화발전기금을 활용할 직접목적사업을 고안 및 추진해야 한다.


영화제작지원과 현장영화인의 역량강화에 힘쓰는 것 외에도, 여성과 영화의 시너지를 일으켜 한국 영화계에 수많은 <벌새>를 태어나게 할 여성 영화인의 잠재성을 놓쳐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때 국내 여성 영화제 규모를 공격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직접목적사업의 일환이 될 수 있다. 여성 영화제는 여성 영화인과 여성 영화만을 위한 축제로, 지금껏 빛을 보지 못한 창작자와 창작물을 발굴할 뿐 아니라 주류 영화계가 다루지 않았던 주제를 다룸으로써 관객에게 폭넓은 시각과 새로운 감상 경험을 제공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매해 여러 지역에서 여성영화제가 개최되고 있지만, 상영 프로그램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는 행사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SWIFF)뿐이다. 영화제는 감독과 작품에게 권위를 부여함과 동시에 대중의 주목을 받게 하는 효과가 있으므로, 여성 영화제는 여성 중심적 작품의 위상을 높이고 여성 영화인의 창작을 독려하기 위해서 반드시 확장되어야 한다.



다시 세자르 영화제로 돌아오자.


영화제에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체포될 가능성을 감안하여 불참을 통보했고, 제작진은 감독의 의지를 따랐다. 성범죄자에게 감독상을 시상한 자리에는 오염된 명예와 긍지가 있었고, 또 다른 남성 감독의 미성년자 성추행을 고발한 배우 아델 하에넬이 참석해 있었다. 그녀는 시상식 도중에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아델이 주연으로 출연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제작진 역시 그녀의 의지를 따라 시상식을 떠났다.



여성의 곁에는 여성이 있다. 여성의 연대는 서로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남성 중심의 구조를 경계하는 여성들은 관습적으로 현실을 재현하는 영화 속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발견한다. 그러니 여성은 사회가 존재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새롭게 뛰어난 영화의 탄생과 긴밀하게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한국 영화계는 여성 영화인을 위한 적극적인 지원이 곧 한국영화 다양성 증진을 위한 투자와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지하고,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를 바탕으로 성평등한 제작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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