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정 감독의 <낙원의 밤>
아무래도 갱스터는 엄태구가 아니라 전여빈인 것 같습니다.
나는 신세계에서 VIP, 마녀를 거쳐 낙원의 밤(이하 낙밤)에 도달한 박훈정의 작품 세계가 진심으로 흥미롭다. 정확히는 그가 낙밤을 통과해 색다른 한국 누아르에 가 닿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송경원 기자는 낙밤의 가장 큰 패착이 "캐릭터(혹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낙밤이 그려내는 캐릭터의 깊이는 배우가 혼자서 쌓아올린 것처럼 보인다. 그건 배우가 잘한 거지 감독이 잘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오직 감초의 역할에만 충실한 차승원, 살려달라고 비는 박호산에게 "니들 영화 찍냐?"라고 대놓고 핀잔 주는 이문식은 능숙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전개의 원동력인 강렬한 복수심을 희석시키고, 관객은 '그래서 얘네가 왜 이렇게 싸워야 하는 건데?'라는 의문을 가진다.
인물의 행동이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했을 때, '감정선'이 이해되지 않으니 시나리오가 투박하다고 느껴진다. 그다음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액션은 박진감 넘치긴 하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다. 복선은 지루하고 카메라까지 정적이다. 아픈 과거를 회상하는 대사는 너무 솔직해서 일견 촌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런데도 러닝타임은 2시간이 넘는다. 신세계만큼의 충격을 기대했는데 결말은 심심하게 끝난다.
이것들을 종합하면 결론은 하나다. 새롭지 않은 누아르, 실망스럽다.
그런 낙밤을 나는 왜 흥미롭게 봤을까. 누아르라는 족쇄를 걸친 낙밤은 별 볼일 없을 수 있지만, 그 족쇄에 전여빈이 균열을 냄으로써 이 영화는 어떤 가능성을 품는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출연해도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 복수극의 가능성. 조직폭력배들 사이에서 소리만 지르다 죽거나 남자 주인공에게 '민폐'를 저지르다 죽거나 숭고하게 희생하는 바람에 그를 각성시키고 죽거나 하지 않는, 소모되지 않음으로써 주연의 자리를 쟁취하는 조연의 가능성.
전여빈이 연기한 시한부 총잡이 재연은 그런 의미에서 "내성적인 갱스터"다. 엄태구가 아니라 전여빈이 갱스터다.
누아르의 세계에서 갱스터는 벌을 받지 않는다. 신세계에서 이정재가 징벌의 최후를 맞지 않았듯이, 전여빈은 징벌이 아니라 해방의 최후를 맞는다. 엄태구 차승원 박호산 이기영이 피할 수 없었던 징벌을 오직 전여빈만이 피해간다. 그는 유일하게 경찰과 타협하지 않은 갱스터고, 경찰이 아무리 달려가도 붙잡을 수 없었던 세계관 최강자다.
감독 박훈정의 전작 <마녀>에서 세계관 최강자로 내세워진 김다미는 처음부터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전여빈은 조연으로 내세워진 주제에 엄태구를 '제끼고' 주연의 자리를 꿰찬다. 그러니 낙밤이 오직 전여빈만을 위해 만들어진 누아르라면, 이 다음에 박훈정이 내놓을 한국식 누아르는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