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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강 Nov 18. 2021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
여성은 괴물이 된다

신상옥 감독의 공포영화 <천년호>의 여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신상옥 감독의 ‘천년호(1969)’에는 신라 시대에 귀신에 빙의된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남편을 욕망한 진성여왕의 질투로, 그의 아내인 여화는 도성 밖으로 추방되었다가 여우 귀신에 빙의된다.


여우 귀신은 무열왕에 의해 힘을 잃고 호수 아래에 뼛가루로 생존한 천 년 묵은 귀신으로, 이미 죽은 무열왕에게 복수하고자 여왕을 죽여 신라를 멸망시키려 한다. 이때 추방되었다가 도성으로 돌아온 여화는 인간과 귀신이 합일한 존재로 볼 수 있으며, 귀신이 빙의됨에 따라 여화는 막강한 요괴의 힘을 얻고 인간으로서의 도덕성은 잃게 된다.


출처=네이버영화, 사진=요괴가 된 여화


호러 영화는 귀신, 요괴 등의 인외적 존재가 제거되었을 때 행복한 결말이 예정된다.


‘천년호’는 여우 귀신이 소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파멸을 맞는다는 점에서 장르의 문법을 비틀었다고 볼 수 있다.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도 마다하지 않던 여화는 남편의 손에 죽고, 김원랑은 아내의 무덤 앞에서 백골이 되고 마는 괴이한 죽음을 맞이한다. 천년호 또한 복수를 성공시키지 못하고 사라졌다는 것, 진성여왕이 왕위를 포기했음에도 결국 김원랑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에서,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거나 등장인물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등의 행복한 결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특히 등장인물의 소원이 이뤄진다는 것은, 한국의 공포영화에서 여성 귀신이 등장할 때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는 한(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한이 풀릴 때 귀신은 소멸할 계기를 얻게 되는데, 천년호는 진성여왕을 죽이는 것으로, 여화는 아이를 죽이고 자신을 겁탈하려 한 도적 떼를 죽임으로써 한을 풀고자 한다. 이때 귀신의 한은 생전에 해결되지 못한 욕망이 사후에도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한을 풀고 싶다는 귀신의 욕망이 인간에게 물리적인 영향을 미치면, 실체화된 한은 곧바로 인간의 공포가 된다.


천년호는 뼛가루가 되어 호수 밑에 가라앉아 있다가, 여화의 몸을 빌림으로써 비로소 원한을 물리적으로 실현할 기회를 얻는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실행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데, 이는 요괴의 기이한 힘을 이용해 인간을 거리낌 없이 죽이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적극성, 즉 욕망을 표현하고 실행하려는 여성 귀신의 태도는 그를 가장 공포스럽게 만드는 요소다.


출처=네이버영화, 사진=여화에게 공포를 느끼는 진성여왕


욕망을 표출하는 태도 자체가 여성적 괴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는 점은 천년호가 여화와 대비되면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여화는 도적 떼에 의해 갓난아이를 잃고, 목숨과 정절을 위협받아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복수를 실현할 힘이 없어 호숫가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천년호가 빙의된 후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무위를 얻어 직접 한을 풀게 된다. 이는 인외적 존재의 힘을 빌려 원통한 마음을 해소하고 도적 떼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여화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이때 천년호는 자신이 여화에 빙의하여 그의 한풀이를 도왔으므로, 여화 역시 몸을 빌려주어 자신의 한풀이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여화의 욕망이 실현된 순간 그는 천년호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신라에 복수하기 위해 몸이 필요한 천년호와, 요괴인 천년호의 힘을 빌려 한을 풀고 되살아나기까지 한 여화는 거울처럼 맞닿아 있다. 사망하는 순간까지 남편을 향한 정절의 신념을 지키고자 했던 여화가, 그와 반대로 요사스럽고 간악한 괴물로 묘사된 천년호와 합일될 때마다 두 존재 간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여기서 여성의 몸은 여성이 스스로 욕망을 해소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되는데, 여화와 천년호가 동일한 몸을 매개로 하므로 다른 이들이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는 점, 빙의되지 않은 상태의 여화가 빙의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경계는 더욱 희미해진다.


희미해진 경계는 결국 이들을 파멸로 이끈다. 아내와 요괴를 분리하고자 했던 김원랑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이는 결국 남편이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고 살해하는 결말의 원인이 된다.


괴물과 동일시되는, 욕망을 표출한 여성적 존재가 모두 제거됨으로써 ‘천년호’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해야 하지만, 이들의 제거에 앞장선 김원랑이 진성여왕의 유혹을 거절하고 아내의 무덤을 지키다가 백골이 된다는 색다른 결말은 관객에게 여운을 남긴다. 이는 <천년호>로 하여금 귀신을 악으로, 귀신을 제거하는 자를 선으로 규정하여 권선징악의 교훈을 전달하려는 여타 작품들과 거리를 두게 하는 지점이다.


비도덕적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여성 귀신과 정절을 지키고 가부장적 제도에 순응하는 여성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로 묘사하여 차별적인 입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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