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일 놈의 야구

워킹맘이 남편에게 얘기합니다-7

by 선율

자기가 야구를 좋아한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땐, 대부분의 남자들은 야구를 좋아하고, 나도 한때는 야구를 봤었고 경기의 규칙 정도는 잘 아니까 우리가 같이 야구 경기를 보며 대화하거나 즐기면 되니 이게 무슨 문제가 될까 싶었어.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이놈의 야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속상할 줄이야!!!


야구라는 게 매일 평일 저녁 6-9시에 경기를 해(월요일은 제외^^). 자기가 그 시간 동안 나와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것보다 야구를 보는 걸 우선순위에 둠으로써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어.


맞벌이를 하는 우리 부부가 아이와 다 같이 함께 하는 하루 중 유일한 시간인 저녁 시간. 이 황금 같은 시간에 자기는 늘 야구를 보기 위해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지. 물론 다음 타자가 입장하는 시간이나, 공수가 바뀔 때 또는 투수가 바뀔 때 등의 잠깐잠깐의 시간 동안에는 나와 아이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여. 평상시 말수도 없는 사람이 애써 질문을 많이 한다거나 집안 정리를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말이야. 자기 딴에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는 거지?


하지만 곧 다시 경기가 시작되면 자긴 이내 핸드폰 화면에 집중해. 그나마 내가 여러 번 짜증도 내고 협박 비슷한 것도 하며 부탁한 끝에 저녁밥을 먹는 시간에는 보지 않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의 경기 시간 내내 자기 관심은 핸드폰 화면 속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했지. 내가 저녁을 먹고 뒷정리를 하는 시간에도, 요즈음은 아이와 한글 공부를 하는 시간에도 내 시야 반경 안에서 한쪽 귀는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해설을 듣고, 시선은 핸드폰 화면을 쳐다봤어. 특히 그날 게임이 엎치락뒤치락할 땐, 그 몰입도가 더더욱 심해지는데 그럴 때면 한쪽 귀는 분명 우리에게 열려있음에도 아이와 나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해.


참다 참다 결국 내가 그만 좀 보라고 한마디 할 때면 자긴 도리어 정색을 했지.


‘내가 밤새 게임을 하면서 돈을 쓰는 것도 아니고 술 먹고 매일 늦게 들어오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방법인데 이것까지 못하게 하면 난 무슨 낙으로 살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안한 듯 핸드폰 화면을 껐다가도 이내 궁금함을 참지 못해 힐끗힐끗 곁눈질로 핸드폰을 보는 자기의 모습을 보며 어이없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자기가 야구를 안 보는 유일한 때는 자기가 응원하는 LG팀이 초반부터 지고 있을 때야. 그런 날은 자기의 야구에 대한 관심도가 급격히 떨어지게 돼. 아주 가끔 혹시나 역전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핸드폰을 잠깐씩 확인하지만 이내 실망한 표정으로 ‘에이 나 안 봐!!!’를 연달아 내뱉곤 하지. 그래서 솔직히 난 LG팀이 경기에서 질 때가 더 좋았어.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특히 초반부터 막대한 점수차로 LG가 지고 있으면 난 엄청 신났다니까.


우리가 싸울 땐, 아예 대놓고 나 보란 듯이 야구만 보며 내 속을 긁어놓았고, 우리 사이가 좋은 날엔 내 눈치를 보며 몰래몰래 틈틈이(그래도 다 보인다고!!!) 핸드폰 화면을 체크하는 식의 날들이 지속되었어.


아이가 어려서는 저녁 먹고 잠들기까지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이 많아. 또 어릴수록 아이는 늘 나한테만 매달려 있고. 그런데 자긴 저녁을 먹은 뒤면 혼자 이것저것 챙기고 돌보느라 바쁜 나와 달리 룰루랄라 자기가 보고 싶은 야구경기에 빠져있는 모습이 너무 얄밉더라. 물론 나 혼자 아이 챙기기가 힘들어서 괴로운 것도 있지만, 자기가 아빠로서 아이가 어릴 때 이 시기에만 해줄 수 있는 게 분명 많을 텐데, 이 시간이 지나면 분명 나중에 이렇게 보낸 시간을 후회할 텐데 이 아까운 시간을 그렇게 흘려보내는 게 안타깝게 느껴졌어. (친정언니 말이, 아이가 어릴 때 아이를 돌보지 않은 남자들은 이때가 예쁜 거 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나중에 후회하지도 않을 거래. 그 말이 더 슬프더라.) 한참 내 몸이 지치고 마음도 예민했을 땐, 그런 남편을 만난 나와 그런 아빠를 만난 아이까지도 불쌍하게 느껴져서 자기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도 있었고.


난 방법을 찾아야 했어. 회사 동료, 후배 남자들과 주위 사람들한테 고민을 털어놓고 인터넷 맘 카페에서도 ‘야구에 중독된 남편’을 검색어로 해서 올라온 글들을 찾아봤어. 먼저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어.


‘그래도 남편이 할 일은 다 하잖아. 집안일도 하고 아이 양치도 챙기고 매일 씻겨준다며. 다른 문제는 없는 거지? 그럼 됐어.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


‘좀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하네. 얘기 잘해봐야겠다.’


전혀 공감도, 도움도 안 되는 그냥 그런 반응뿐이었어. 맘 카페에 검색된 글들은 하소연하는 글만 많을 뿐, 이런 방법을 써서 효과를 보았다거나 개선했다는 글은 눈에 띄지 않더라고. 단지 이런 남편들이 많이 있구나, 오히려 우리 남편은 양반이네, 더 심한 사람들도 정말 많네 라는 위로만 그 순간 잠시 얻었을 뿐이야.


이것저것 얘기 들어보고 검색해 보고 생각해본 결과 난 자기의 야구 시청을 줄일 만한 몇 가지 방법을 자기한테 제안해보았지.


첫 번째, 아이가 잠들기 전까지는 아이와 나에게 집중해 하기. 내가 아이를 재우러 들어가면 그 이후엔 늦게까지 뭘 해도 아무 상관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자긴 아주 가뿐히 내 제안을 거절했어. 실시간으로 경기 상황을 봐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는 안 된다고 말이야. 그래 알아, 나도 처음부터 내 말을 들어줄 것이라고는 기대 안 했다고!


두 번째, 매일 저녁마다 그렇게 야구를 보는 건 너무하니 요일을 정해서 일주일에 두세 번만 보기. 정해진 날에는 아이와 나에게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야구만 봐도 괜찮지만 대신 정해진 날이 아닐 때는, 아예 야구를 보지 말 것. 하지만 이 또한 자기는 싫다고 했어. 자기 나름의 싫은 이유가 명확히 있었지. 경기가 언제 재미있고, 언제 중요한 경기가 될지 모르는데 야구 보는 요일을 임의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 아이고, 우리 남편, 참 이유가 타당해.


난 백 번 양보해서 마지막 제안을 했어. 그래 좋아. 그렇게 보고 싶다면 핸드폰으로 보지 말고 차라리 케이블을 신청해서 TV로만 야구 채널 중계를 볼 것. 그렇지 않아도 거북목 진단을 받은 상태인데 경기 시간 내내 구부정한 자세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너무 안 좋아 보였으니까. 그런데 자긴 이것도 단호히 싫다 하더라. 자기는 자기가 응원하는 LG팀의 전담 DJ(항상 흥분되어 있고, 욕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수위까지 매번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LG팀 입장에서 편파 해설하는 DJ)의 해설을 들어야 한다면서 이 DJ의 해설을 들으면서 봐야 재미있고, 이 중계를 시청하는 사람들의 실시간 댓글도 봐야 하니 케이블 야구 채널은 필요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오히려 케이블 신청 비용을 아껴주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뿌듯하게 얘기하더라고 맙소사...


미움받을 용기 2 책에 보면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로부터 비롯되는데 이를 푸는 첫걸음은 상대방을 존경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존경에 대한 정의가 나오는데,

존경이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이란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

라고 하더라. 난 이 문장을 자기와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자기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자기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이해했어.


그래서 난 어느 순간부터 쿨하게 자기를 바꾸려는 마음을 포기한 거야.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이 없어서 포기한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어쨌든 포기한 이상, 더 이상 야구를 보는 자기한테 짜증도 화도 내지 않았고 못 보게 막지도 않았어. 자기가 야구 경기를 보는 거에 관해서는 날카롭고 거친 잔소리를 그만한 거지. 야구를 보는 자기에게 후식도 챙겨주고, 오히려 내 기분이 좋을 땐 한 번씩 LG점수도 물어보고, TV 중계를 하는 날엔 같이 보기도 했지.


그렇게 신경을 꺼버리고 나니 내 스트레가 먼저 줄더라. 그런데 신기한 건 자기도 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야. 오히려 내가 잔소리할 때보다 더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횟수와 시간이 줄어들었어(LG가 경기를 잘 못해서 그랬나^^). 그러면서 야구를 이용해서 아이와 대화를 하고 놀아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


‘아빠, 지금 우리 팀 공격이야?’

‘아니 지금 7회 상대팀 공격이니까 이때 우리가 빨리 씻어야 다음 우리 팀 공격을 볼 수 있어, 그러니까 빨리 씻자.’


‘아빠, 지금 몇 대 몇이야?

‘3대 2’

‘우리 팀이 3? 아까 2점이었는데 1 더 해서 3이 됐네?’

‘응, 와~~~ 또 2점 났다. 그럼 3점에서 이제 우리 팀이 몇 점이지?’


자기는 이제 귀찮아하지 않고 아이한테 친절하게 점수도 설명해주고, 더하기 빼기도 같이 연습하고, 경기 규칙도 아이한테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있어. 거기다 얼마 전에는 아이한테 야구 글러브와 공을 사주더니, 주말이면 아이랑 캐치볼 연습을 하고, 공 던지는 투구 폼도 아이에게 열심히 알려주고 있지. 신기한 건 아직 글러브를 낀 채로 공도 제대로 못 잡는 아이가 싫어하기는커녕 열심히 하려 하고 자세도 따라 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야. 이러다 우리 아이가 야구선수한다고 하는 건 아닌가 몰라.


‘홍찬기 안타, 안타 날려 홍찬기~~~ 홍찬기 안타 날려버려라~~~

홍찬기 안타, 안타 알려 홍찬기~~~ 무적 LG의 승리를 위해~~~’


오늘도 자기랑 아이는 LG 선수 중 한 명의 응원가를 같이 부르며 이것저것 대화를 하고 있어. 옆에서 보면 한숨이 나오다가도 그렇게라도 아이가 아빠랑 친해지고 자기도 즐겁다면 난 그걸로 만족해. 자기가 그토록 원하던, 즉 아들과 같은 LG 유니폼을 입고 같은 LG 모자를 쓰고 야구장에 갈 날도 머지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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