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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율 Mar 07. 2023

납땜하는 여자

1화 학과 선택

학창 시절, 수학을 참 좋아했다. 다른 과목은 그냥 남들 하는 만큼 따라가는 수준이었지만, 수학만큼은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잘하는 편이기도 했다. 평범한 고3 수험 생활을 거쳐 서울 끄트머리 집에서도 1시간 정도면 통학 가능한 대학교에, 내가 좋아하는 수학과목이 포함된 이학부(수학, 물리, 화학, 생물 포함)에 무난히 합격했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을 보냈다. 놀러 가듯 학교를 다녔던 거 같다. 따스한 봄날, 꽃이 만발한 교정에 반해 햇볕을 쬐며 앉아있다가 수업을 한 번씩 땡땡이치기도 하고, 소속된 학과와 동아리 엠티에도, 방학엔 농촌봉사활동도 일주일씩 다녀오기도 했다. 소소한 일상을 누리며 대학 1학년을 마무리하는 그 해 12월에 IMF가 찾아왔다. 


원래 집이 넉넉하지도 못했다. 불안정한 아빠 덕분에 3형제를 키우며 엄마도 일을 하셨고, 나도 일찍부터 과외며 이런저런 알바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보탰다. 그런 상황에 IMF가 터지자 아빠가 회사를 그만두신 것부터, 엄마 일, 내 알바 모두 한 순간에 끊겼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뼈저리게 체감하며 2학년 1학기를 다녔다. 1학기 등록금은 어찌어찌 겨우 마련했지만 2학기 등록금은 방법이 없었다. 취업이 잘된다는 주변 사람들의 얘기에 솔깃해, 2학년 때 전공을 수학이 아닌 화학을 선택하는 바람에 학과 공부에 흥미도 잃었을 때였다. 장학금은 고사하고, 나랑 안 맞는 전공 때문에 스트레스만 받고 있는 상황에 어차피 등록금도 없는데 일단 휴학이나 하자는 결정을 해버렸다.

   

처음엔 잠깐 쉬면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알바를 하면서 돈을 벌며 시간만 보내다 보니 휴학한 지 2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의 휴학은 학교에서 허락해주지 않았다. 나는 결정해야만 했다. 복학을 할 것인가, 학교를 그만둘 것인가. 그때는(지금 생각하면 2년은 아무것도 아닌 시간인데) 같은 학번 친구들과 비교해 나만 뒤처져서 낙오자 같다는 생각에 다시 학교로 갈 엄두를 못 냈다. 그 친구들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수능공부를 시작했다. 


1년 반의 대학생활, 2년의 휴학, 그리고 반년 정도의 수능준비로 남들보다 4년이 늦은 상황에서 받아 든 수능 성적표는 4년 전보다도 못한 점수를 보여주었다. 막막했다. 난 이제 입학하면 내 동갑 친구들보다 4년이나 늦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무조건 취업이 잘 되는 학과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학과를 찾아보았다. 4년 전에는 수학, 수학교육 이런 과만 보고 별생각 없이 담임 선생님 의견에 따라 학교를 지원했는데 이제는 내가 모든 걸 다 알아보고 결정해야만 했다.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할 학교와 학과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남들보다 출발선은 늦지만 나에게 맞는 전공을 제대로 선택하고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기회가 있는 학과, 그런 걸 찾아야 했다.(지금 생각하면 무슨 과를 선택했어도 그 시기에는 뭘 시작해도 뭐든지 다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시야가 좁았고 마음이 급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공학계열이었다. 공대 학과들은 기본적으로 취업률이 좋았다. 문제는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 내 점수에 맞춰서 갈 수 있는 곳 중에는 마음에 드는 학교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4년 전 다녔던 학교보다 인지도가 낮은 학교를 4년이 늦은 지금에서야 들어가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학비는 또, 어찌나 비싼지, 휴학하면서부터 용돈은 물론 부모님께도 생활비를 조금씩 드리고 있었던 나로서는, 어차피 입학 후에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학비를 무시할 수 없었다.(다들 학자금 대출받고 학교 다니고, 졸업 후 취업해서 갚아나가는데, 난 그동안 빚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늘 옆에서 지켜보며 대출을 받고 학교를 간다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눈을 돌렸다. 통학 가능하고, 무엇보다 취업률도 높고, 장학금도 받을 수 있고, 2년만 다니면 졸업을 할 수 있으니 늦게 시작한 걸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전문대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다들 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어했다. 내가 아무리 얘기하고 설명해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서울에 4년제 대학교를 잘 다니다 휴학을 하더니, 4년 뒤에 나타나서는 전문대를 다시 갔다고? 그것도 공대를? 도대체 왜?’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한다. 전문대 졸업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연봉 차별, 그리고 여자 공대생이 업무상 사회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힘든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내 결정을 이해 못 하고 반대할 만하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20년 동안 사회생활을 한 나 조차도 지금 주위에서 누군가가 나와 같은 결정을 내리려 한다면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아마 그때의 나도, 사회가 이렇다는 현실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아마 다른 결정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때는, 부모님을 포함한 내 주위에 나에게 현실적인 얘기를 해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니 누군가는 해주었을 수도 있다. 단지 내가, 내 선택과 결정에 대해 넘쳐나는 자신감으로 인해 그 얘기를 깊게 듣지 않고 흘려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늦은 나이에 선택하고 시작한 두 번째 대학과 전공은 더 이상 잘못된 선택이 되지 않도록 아니 내가 선택한 답이 정답이 되도록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의 선택은 좋은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취업한 후, 나를 20년 동안 한 곳에서 일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출발점이 되었다.  


2화 전파통신 전공 선택(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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