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는 방산 RF(고주파수로 하는 무선 통신을 Radio Frequency, 즉 RF라고 한다) 장비를 정비하는 회사였다. 그러던 중, 장비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되면서 정비하던 장비를 새로 개발해야 할 기회가 생기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장비 개발을 하기로 결심한 회사는 개발 역량을 키우려 하고 있었다. 나를 면접 보신 연구소장님은 나보다 겨우 3개월 전에 입사하셨고, 이 분을 시작으로 신입사원인 나를 뽑고, 계속해서 경력자를 더 뽑았다. 연구소를 세우기 위한 요건을 갖추는 중이었다.
연구소장님이 오시고 나를 포함하여 새로 뽑은 직원 4명과 기존 직원 3명을 합한 총 7명이 새로운 장비 개발을 위해 투입되었다. 연구소장님 바로 아래, 과장님 한 분만 30대였을 뿐, 다 20대로 나이차이도 크지 않고, 학교 다닐 때 남자들밖에 없었던 환경을 익히 경험했던 터라, 내가 나이가 가장 어리고 여자 혼자였음에도 회사의 이런 환경이 전혀 불편하거나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학교에서는 내가 대빵 역할이었는데 여기선 제일 막내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입사 후, 나에게 주어진 첫 업무는 테스트용 기판에 필터를 설계해서 만들어 보는 일이었다. 필터란 원하는 주파수의 신호만을 통과시키고 원치 않는 주파수는 잘라내는 회로를 말한다. 먼저 주어진 규격을 만족하도록 시물레이션 툴을 이용하여 회로를 설계한 후, 테스트 보드에 실제 회로를 구현할 자리를 마련하고 L(인덕터), C(캐패시터)를 납땜하여 회로를 꾸민다. 이를 계측기를 사용하여 성능을 측정하고, 성능이 부족할 경우 튜닝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원하는 규격을 만족하면 완성이다.
필터 규격을 주시면서 과장님은 앞으로 개발할 장비에 쓰일 필터니까 잘 만들어보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헉… 신입사원에게 처음부터 진짜 장비에 들어가는 회로를 만들어보라고?… 너무 부담스러운데…
시물레이션 툴을 이용하여 회로를 설계해 본다. 전공 실습시간에 써보긴 했지만 잠깐 사용했던 거라 툴 사용이 서툴고 미숙하다. 학교 때 배운 책과 인터넷을 찾아보며 더듬더듬해볼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의 결과가 나오면 테스트 용 기판에 LC소자를 납땜한다. 학교에서 써본 저항과는 달리 LC 소자는 칩 타입으로 사이즈가 엄청 작다. 가로 2mm 세로 1.2mm, 더 작은 건 가로 1.6mm 세로 0.8mm인 이 칩을 핀셋으로 집어 정확한 자리에 납땜을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상한 형태로 삐뚤빼뚤 못생기게 납땜하고 있는 걸 발견한 옆의 선배가 한마디 한다.
‘저기 가보면 안 쓰는 칩 모아놓은 거 있으니 가져다 칩 부품 납땜하는 연습부터 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매일 한 시간씩은 납땜 연습 하시고요’
마음대로 되지 않고 모양도 예쁘지 않은 내 형편없는 납땜실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당분간은 납땜연습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 어차피 개발이 끝나면 실제 물건을 만들 때는 장비를 이용하여 부품을 기판에 부착할 텐데 납땜 실력이 중요할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고난도의 업무를 배우고 익혀야지 겨우 납땜하려고 회사에 온 건 아니라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만심만 가득 차했던 생각이다. 하지만 선배들 모두 능수능란한 납땜 실력을 보면서 개발 중, 어떤 회로를 시험해 보고 성능을 확인해 보려면 납땜능력은 필수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납땜에 능숙해져야 회로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잘못된 납땜으로 인한 문제 발생 가능성을 배제하고 문제의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회로 검증 과정을 여러 번 거친다고 하면 결국 숙련된 납땜실력은 개발 시간을 확실히 줄여주게 된다. 또 튜닝과정에서도 납땜은 필수이다.
다음과정은 계측기로 측정하는 단계이다. RF 장비를 측정하는 계측기들은 하나같이 다 고가이다. 학교 실습 때 장비를 경험해 보긴 했지만 학교에 단 한 대밖에 없는 장비라서 순서대로 한 명씩만 만져볼 수 있었다. 비싸니까 조심히 다루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여러 번 들으며 내 차례를 기다렸고, 교수님의 감독하에 정말 조심조심 만져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이 혼자 장비를 만져볼 용기를 낼 수 없게 했다. 결국 옆의 선배에게 좀 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주위 사람의 도움을, 조언을 필요로 하는 그런 상황은 매번 생긴다. 그것도 신입 때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경력이 쌓일수록 본인의 분야가 생기기 마련인데 일을 하면서는 본인이 직접 개발하지 않은 분야에 대해 알아야 하거나 의문이 생길 때가 너무나 많다. 그러면 그쪽을 직접 해보거나 미리 접해본 경험이 있던 사람에게 질문을 하게 되고, 단순한 질문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설계를 직접 도와준다거나 시험을 같이 해보아야 할 경우도 너무나 많다.
신입 때 내 주위 선배들만 유독 그런 게 아니고, 지금까지도 느끼는 거지만 대부분의 엔지니어들이 선량하고 순수하다. 누군가에게 도움주기 좋아하고 질문을 받으면 아는 건 최대한 다 말해주려고 애쓰고, 도와주고 싶어 한다. 본인이 모르면 어떻게든 찾아보고 알려주려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하는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도 즐겁게 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겉보기엔 칙칙하고 시커멓고 단순한 남자들이지만 내 눈엔 천진난만하고 순수해 보인다.
드디어 계측기에 내가 꾸민 회로를 연결했다. 물론, 한방에 나올 리는 절대 없다. 그다음 단계인 튜닝에 들어간다. 튜닝은 말 그대로 여러 소자를 하나씩 값을 바꾸어 가면서 필터 성능이 어떤 게 변하는지 확인하고, 원하는 규격을 만족하도록 찾아가는 과정이다. 맞다. 한마디로 노가다 작업이다.
물론 아무 근거 없이 소자를 막 바꿔보는 건 아니다. 필터를 이루는 각 소자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위치의 어느 소자를 바꾸었을 때 필터 파형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확인해 보고, 실제 소자를 바꾸었을 때의 변화와 시물레이션에서 값을 바꾸었을 때의 변화도 비교해 보면서 경향과 차이를 익혀나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경험을 쌓고, 이런 경험이 쌓여 필터 설계의 노하우가 만들어진다. 해보면 해볼수록 튜닝시간은 빨라지고 몇 개의 소자를 써야 규격을 만족할 수 있는지 어느 위치의 어느 소자값을 바꿔보면 성능이 확보될지 등에 대한 감을 잡게 된다.
방법만 다를 뿐, 필터뿐 아니라 RF 모든 분야에서는 튜닝이 필수이다. 3D업종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하지만 튜닝작업을 역설적으로 RF의 꽃이라고도 한다. 튜닝을 통해 안 나오던 성능이 나오고, 시물레이션으로 안 되는 성능을 뽑아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뭔가의 지식을 전수받아 0에서 100 상태로 딱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경험해 보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면서 하나하나 노하우를 쌓아가는, 감이라는 것과 경력을 결코 무시 못하는 분야가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RF이다.
그런 능력이 처음부터 있을 리 없는 나로서는 무식한 막 튜닝부터 시작한다. 소자를 바꾸고 변하는 걸 기록하고 또 바꾸어보고 또 바꾸고…. 하다 보면 인두기에 의해 테스트 기판이 손상되어 너덜너덜해진다. 그럼 새로운 기판으로 다시 시작한다. 중간중간 시물레이션 툴에 튜닝한 값을 넣어보며 안 되는 부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도 한다. 튜닝은 어려웠고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입사 후, 첫 한 달 이상을 필터 하나만 가지고 씨름했다. 가끔씩 연구소장님이 옆에 와서 잘되고 있는지 물어보기도 하시고, 이런저런 얘기도 해주셨지만 크게 뭘 시키지 않으셨다. 닦달하거나 매일매일의 결과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하루 열심히 일을 했지만 눈에 띄는 결과가 없어 허탈한 마음으로 왜 이것만 시키는지 투덜거리며 집에 가는 날이 많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RF의 기본 부품인 필터를 만들어 보면서 혼자 생각해 보고 머리를 짜내보고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 있던 시기였다. 기본적인 설계 방법을 익히고, 계측기를 만져보고, 납땜연습도 충분히 하고, 툴도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월급 받으면서 공부도 하고 내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은 이렇게 첫 입사 후 신입으로 모든 게 용서되는 몇 개월의 시간이 아닌가 싶다.
본격적이 업무 적응을 난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5화 신입 같지 않은 신입(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