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율 Mar 22. 2023

납땜하는 여자-5화 과장님 조언

회사에 적응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회사 신입이라 부담 가질 일은 하나도 없었고 여러 가지 설계에 필요한 툴을 익히고, 매일 일정시간 납땜 연습하고, 측정 계측기들에 익숙해지기 위해 다루는 법을 배웠다. 실제 개발 업무를 하기 전에 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빨리 습득해서 개발 역량을 갖추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면서 주위 선배들이 실제 어떻게 처음 주어진 규격에서부터 실제 그 규격을 만족하는 모듈을 만들어 내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연구소장님 말씀으로는 내가 운이 아주 좋다고 한다. 신입사원이 입사하자마자 개발 한 사이클을 실제 경험할 수 있는 건 흔치 않은 일이고,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온통 모르고 생소한 것 투성이의 일들을 사무실 내 자리와 시 제작실을 왔다 갔다 하며, 이것저것 배우고 질문하고 연습하다 보면 금세 점심시간이 돌아오고 또 어느 순간 퇴근시간이 된다. 중간에 선배들과 커피도 한잔씩 마시고, 흡연 장소에도 따라 나가서 얘기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버리곤 했다.

 

20대 중반에 입사한 회사에서 선배들은 모두 나보다 1~3살 정도밖에 많지 않은 나이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내 나이나 선배들 나이나 크게 상관없어 보이지만, 그 당시 내가 느끼는 나이와 실력차이는 엄청났다. 나이차이만큼 다들 다른 곳에서, 최소한 우리 회사보다는 더 큰 회사에서 여러 가지 개발 경험을 익히며 경력을 쌓고 왔기 때문에 신입인 내가 보기에 그 선배들은 나에 비하면 저 하늘 끝 보이지 않는 어딘가라고 여겨질 만큼 엄청난 실력을 가진,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업무 회의 때, 연구소장님 질문에도 대답이 척척 나오고 본인의 의견을 얘기할 줄 알았으며 각자 알아서 자기 맡은 부분을 진행해 나갈 줄도 알았다. 업체와의 통화도, 회사에 방문한 업체 사람들을 대하는 것까지도 아주 능숙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내가 몇 년 경력을 쌓는다 해도 이 선배들만큼의 실력을 쌓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확실히 대답을 할 수 없을 만큼 선배들은 당당해 보였다. 이런 선배들과 업무 얘기, 사는 얘기하며, 저녁때 술도 한잔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다. 입사 후 한 달쯤 지나 연구소장님이 회사생활은 어떤지 물어보셨을 때, 회사에서 점심을 제공해주지 않아 비싼 서초동에서 매일 점심을 사 먹는 게 부담스럽다는 거 빼고는 다 좋다고 말씀드리기도 했으니 회사 생활에 문제는 없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어느 날 회식이 있었던 날, 끝나고 과장님과 같이 간 적이 있었다. 과장님은 연구소장님보다 우리 회사에 오래 계셨던 분으로서, 연구소장님께 제일 업무적으로 도움을 주시는,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연구소장님과 늘 얘기하시는, 그래서 연구소장님이 제일 든든하게 생각하시는 그런 분이다. 그런 과장님과 난 집이 같은 방향에 있었던 것이다. 


평상시에는, 솔직히 과장님이 어렵고 불편했다. 일단 나에 비해 한참 높은 직급이었고, 나에 비해 학벌도 높고 아는 것도 많고 업무 경력도 월등히 많으니 초짜인 나로서는 회사 내에서 업무 관련한 얘기를 과장님 앞에서 꺼내는 것 자체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과장님은 술도 잘 못하셔서 괜히 나 혼자 술 취해서 실수라도 할까 봐 술자리에서조차 편하게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같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길, 썰렁한 분위기를 없애고자 이런저런 쓸데없는 질문과 대답이 오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말이 끊긴 어느 순간, 과장님이 난데없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oo 씨, 술 많이 마셔?’


‘네…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게 좋고, 술자리가 좋아서 자주 마시는 편이에요.’


‘술이 세니까 더 자주 마시나 봐? 일주일에 몇 번이나 마셔?’


‘네 아빠 유전자 덕분인지 술이 센 편이에요. 얼굴색도 잘 안 변하고, 다음날도 크게 힘들지 않아요~매번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친구도 만나고 회사사람들과도 만나서 마시곤 해요.’


맥주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지는 과장님보다 술만큼은 내가 잘한다는 자신감에, 이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가 내가 술을 얼마나 잘 마시는지 부러워서인지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과장님 질문에 난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런데 oo 씨, 공부는 안 해?'

‘…………………. 네?’


‘이쪽 공부해야지? 좀 지나서 본격적인 업무 하면 그땐 바빠서 진짜 공부할 시간도 없어. 내가 경험해 보니 지금이 공부하기 제일 좋은 시기야.’    

‘아…네…’


‘집에 가서 전공 책도 더 들여다 보고 업무 관련 논문도 찾아 읽어보고 지금 공부해. 그리고 이런 거 구독해서 봐. 무료니까 신청만 하면 다 보내줘. 출퇴근 시간만 봐도 큰 도움이 돼’


그러고 보니 과장님 손에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Microwave Journal’이라는 얇은 잡지책이 손에 들려져 있었다. 잡지를 통해 이쪽 분야의 최신 동향과 새로 나온 신기술, 그리고 광고를 통해서도 어떤 부품들이 새로 나오고 자주 쓰이는지를 알게 된다는 설명도 덧붙이셨다. 


너무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했다. 취기가 확 달아났다. 출근하면 다들 모닝커피 한잔 하며 어제 퇴근하고 뭐 했는지에 대한 잡담부터 하곤 했는데, 맨날 술 먹으러 다니고, 친구 만나서 놀기 좋아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게 보인게 분명하다. 그 뒤부터 과장님이 먼저 지하철에서 내리실 때까지 얼굴을 들지 못하고 과장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하나씩이라도 챙겨서 읽어보고 공부해 두면 진짜 나중에 많이 도움 될 거야, 00 씨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네…’  


2년 동안 배운 전공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다 못 배운 전공책들을 보며 아쉬워했었다. 하지만 정작 회사에 오고 나서는 업무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취업으로 모든 게 끝나버린 것처럼 놀러 다니기만 책 한번 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규격에 맞는 전체 RF 시스템을 구성하고 각각의 세부 모듈의 규격을 잡아가고 업무를 배분하는 총 프로젝트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는 과장님을 보면서는 이미 어느 수준의 레벨에 올라가 있어서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과장님도 매일 최신 기사와 논문을 찾아서 읽고 계셨던 것이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당장 잡지부터 신청했다. 회사와 주소만 입력하면 끝이었다. 알고 봤더니 선배들도 구독하는 잡지가 있었고, 관련 기술을 찾아볼 수 있는 학회 논문들도(그 당시에는 CD로 구워서)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엔지니어가 되리라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가져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납땜하는 여자-4화 업무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