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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율 Apr 05. 2023

납땜하는 여자-8화 사수와의 만남 1

회사는 계속해서 사람을 뽑았다. 기존에 조립에서 납품만 하던 일이 아니라, 장비의 주파수를 변경하여 새로 개발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개발자들이 필요했다. 연구소장님은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력직으로 사람을 채웠다. 그러다 보니 신입사원인 내가 입사했을 때, 기존 입사자들은 당연히 선배였고, 내가 입사한 이후 들어온 직원들 역시 다들 경험 있는 선배들이었다. 그래서 난 한동안 막내로 지내야 했다.


회사에는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 막내였던 한 살 많은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 입장에서는 신입이 들어오니 막내 생활을 벗어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을 텐데, 막상 여자인 내가 들어오니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업무 특성상 그날 사용해야 하는 계측기를 옮겨와 세팅을 해 놓고 일을 해야 하는데 무거운 계측기를 옮겨놓고 계측기 세팅을 준비하는 일을 나에게 차마 시키지 못했으니 말이다.(오히려 내가 쓰는 계측기까지 선배가 옮겨주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난 늘 최소한 내가 쓰는 계측기만큼은 웬만큼 무겁지 않으면 스스로 옮기려고 노력했다.) 나에게 이것저것 편하게 심부름을 시키거나 지시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듯 보였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그 선배는 부모님으로부터 여자는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랐다고 한다.(그래서 하나 있는 여동생에게도 끔찍이 잘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 선배 덕분에 몸은 비록 편했지만 마음은 더 불편했다. 처음이라 어리숙한 나에게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 선배는 말도 없이 미리 알아서 혼자 다 해버리니 의도치 않게 곤란한 상황이 한 번씩 발생했다. 여자인 날 위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한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른 선배가 한 번씩 날 보며 표정은 웃고 있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한 번씩 건넸다. 


‘00 씨는 전혀 막내 같지 않아.’


‘누가 신입인지 모르겠어’


다른 선배들 눈에는 나 대신 궂은일을 다 하는 그 선배 모습에, 상대적으로 내가 탐탁지 않아 보였나 보다. 그때마다 하나씩 얘기해 주면 좋으련만 한 번씩 느닷없이 이런 얘기를 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그런 얘기가 또 나왔을 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얘기해 달라고 항변한 적도 있었다.  


‘그걸, 꼭 얘기해야 알아?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눈치가 없네’


눈치가 없다는 말을 그때 처음 들어보았다. 내 딴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한다고 했는데도 내 모습이 이렇게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속상함과 민망함이 교차했다. 조금은 억울한 마음까지도 들었다. 이렇게 비꼬지만 말고 툭 터놓고 얘기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 가서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개발해야 하는 모듈은 2종류였다. 나는 그중 신호를 크게 증폭시키는 기능을 하는 파워 엠프(Power Amplifier) 모듈을 개발하는 쪽으로 배정되었다. 엠프 개발 담당 선배가 곧 나의 사수가 되었고, 그 밑에서 개발하는 데 필요한 걸 도우며, 실질적인 개발 과정을 잘 배워야 했다. 


어려웠다. 아직 개발 규격이나 개념이 나에게는 생소했다. 성능을 표현하는 각 각의 항목이 뭘 의미하는지, 실제 장비 운용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주파수만 변경할 뿐 물리적 사양과 모든 성능은 동일해야 한다는 데, 그 조건이 왜 까다롭고 힘든지를 알 수 없었다. 회의에 참석할 때나 선배들이 개발 관련 업무 얘기를 주고받을 때, 모르는 용어나 개념이 수시로 튀어나왔지만 중간에 끼어들어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조용히 물어봐야 했지만 일을 하다 보면 잊어버리기 일쑤이고, 어떤 날은 그냥 지나쳐버리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 며칠 후 다시 관련 얘기가 들리면 다시 한번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런 날들이 반복됐다. 


회사 내에 친구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서툴고, 스스로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할 때, 이런 마음을 나누고, 같이 공부할 수 있는 동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업무를 익히는 데 긍정적인 기운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회사에 있다면 한결 회사생활이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저랑, 만나보실래요?’


내 사수가 나에게 꽃다발을 내밀며 얘기한 때가 그런 생각이 가득했을 즈음이었다.

 

그 선배는 내가 입사한 후 5개월 정도 후에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엠프 개발을 위해 뽑은 사람이었고, 내가 보조역할을 하기로 하면서 내 사수가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엠프 성능을 구현하기 위해 주요 소자를 뭘 사용할지 부품 검토 중에 있었고, 부품 성능 확인을 위한 테스트용 기판을 여러 가지 설계해서 시험할 때쯤이었다.


본격적으로 개발에 들어가기에 앞서 알아야 될 거, 공부해야 할 게 많아서 그 선배와는 여러 가지 업무 관련 이야기를 많이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 질문할 거리가 많은 내가 물어보는 식이었고, 그 선배는 주로 대답을 했다. 귀찮을 만도 한데, 내 질문에 그 선배는 항상 진심으로 대답을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같은 회사의 같은 일을 하면서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개발 업무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넘쳐났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야근을 할 때였는데 차가 있었던 그 선배가 훨씬 더 먼 우리 집까지 나를 데려다주는 횟수가 늘어나며 우린 점점 친해져 갔다.

 

그 선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이제 회사 내에 절대적인 내 편이 생긴다는 사실에 기분이 설레었다. 이제 무슨 일이든지 언제든지 그와 얘기하면 되었다. 물론 그가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해결책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적어도 모르는 걸 같이 공유할 수 있고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든든했다. 회사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전후 사정을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퇴근하며 통화하며 바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눈치 보지 않고 속 시원히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는 누군가가 늘 내 옆에 있다는 건 회사 생활에 있어서, 특히 신입인 내가 본격적으로 회사 업무를 배우고 회사 생활을 적응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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