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연구소를 만들고 처음 개발 과제가 진행되었다.
튜너라고 하는 수신기 부분에 필요한 모듈과 파워 엠프, 즉 송신기에서 최대 출력을 내는 모듈 2종이었는데, 회사는 그동안 해외에서 개발된 이 장비를 부품만 전량 수입해 와서, 단지 조립 및 시험, 즉 양산만 하여 군에 납품해 왔었다. 그러다 군에서 사용 주파수를 바꾸기로 결정했고, 회사는 이번 기회에 개발 역량을 갖추어서 이 품목에 대해 초기 개발부터 마지막 양산까지 참여함으로써 부가가치를 올리고 회사 규모를 한 단계 도약시키려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작은 회사에서 결코 쉽지 않은 연구소장님 이하 개발 인력들을 여러 명 뽑고 개발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장비와 환경에도 투자했다. 회사는 이번 개발 성공여부에 따라 회사의 존폐가 달려있는 셈이었다. 이번 개발 성공으로 한 가지 장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연구소 역량을 키워나가 개발 사업에 계속 참여함으로써 여러 가지 양산품목을 가져가려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둘 중 튜너는 개발을 하겠다고 나선 회사가 다행히 우리밖에 없었다. 성능만 만족시킨다면 우리 회사 제품이 그대로 국산화된 제품으로 인정받아 무난히 양산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파워 엠프는 달랐다. 경쟁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 회사 또한 이번 기회를 잡기 위해 외부에서 사람을 데려오는 등 엠프 개발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결국, 파워 엠프는 BMT를 진행하기로 했다. BMT란 Bench Mark test(벤치마트 테스트)의 약자로 성능평가비교시험이라 불리는데 정해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경쟁사들이 동시에 성능 시험을 실시하여 주어진 규격을 빠짐없이 다 만족시키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BMT에서 이긴 회사가 해당 사업을 따낼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양산수량이 보장되어 있었고 해당 모듈의 가격과 부가가치를 아는 회사로서는 둘 중 어느 것 하나 빼앗기기 싫었고, 그래서 회사의 모든 관심은 온통 파워 엠프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초고주파용 부품은 사용 가능한 주파수가 정해져 있다. 그래서 사용 주파수가 달라지면 관련 부품이 모두 달라져야 한다. 또, 넓은 주파수 대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자라고 해도 낮은 주파수보다는 높은 주파수에서 대부분의 성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주파수를 높이면서 똑같은 성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급의 부품으로 변경해야 하고, 이 말은 공급전력을 높여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이번 개발은 기존에 쓰던 공급 전력량은 동일한 조건에서 변경된 주파수, 즉 높아진 주파수에서 동일한 성능을 구현하는 게 관건이었다.
개발 실무 총책임자였던 과장님 밑으로 파워 엠프 개발은 개발 담당자인 내 사수와 개발 보조였던 내가 맡게 되었다. 회사의 사활이 걸린 너무나도 중요한 그 개발과제에 참여한 나였지만 난 그런 회사의 부담스럽고 무거운 입장과는 상관없었다. 난 책임자도 아니었고 내가 딱히 의견을 내거나 주도적으로 뭘 해볼 만한 수준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내 나름대로 처음 개발 과제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개발을 꼭 성공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수가 내 남자친구가 아닌가. 다른 선배 사수와 같이 했다면 사소하고 쉬운 걸 모른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서, 설계하느라 바쁜데 미안해서 질문하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난 덕분에 그때그때 모르거나 이해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 그에게 거침없이 물어보고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그 또한 여자친구인 나를 위해 궂은일은 도맡아 하려고 했고, 개발 관련 모든 일과 과정을 나와 공유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일도 재미있었고 연애도 재미있었다. 첫 개발을 수행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고, 이때의 느낌과 열정과 습득한 지식은 20년 동안 내가 개발자로서 일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큰 책임감 없이, 하지만 내 직분에는 과분하리만큼 하나의 개발 과정에 참여하면서 일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생겼던 것이다.
먼저 변경된 주파수에 맞는 주요 부품들을 검색해서 적당한 부품을 선정해 보는 게 처음 할 일이었다. 효율, 소비전력, 최대출력, 깨끗한 신호 특성 등등을 고려해야 한다. 대부분의 파워 엠프 성능은 마지막 증폭기를 뭘 사용하느냐와 마지막 증폭기가 성능을 제대로 내기 위해 그 전단과 어떻게 매칭시키느냐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바로 노하우와 직결된다. 사용해 본 엠프와 부품들이 많을수록 부품 선정은 수월해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부품의 수많은 회사 중에 사용경험이 있는 부품이 많을수록 관련 회사 제품을 검색하고 선정하는 데 있어서, 또 선정된 부품을 부가 회로와 함께 설계하고 특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사용해서 검증해 본 부품과 회로를 사용하는 것은 엄청난 개발 시간을 단축시켜 주고, 새로운 회로를 꾸미고 분석하는 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선정된 부품을 바탕으로 전체 성능을 계산해 본다. 최종 출력은 각각의 특성이 더해지고 영향을 준결과이다. 그래서 먼저 최종 성능이 어떻게 나올지를 미리 계산과 분석으로 예상해 보는 일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제작비용을 줄일 수 있고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마지막 증폭기로 사용할 부품을 몇 개 선정하여, 회로를 설계하고 종류별로 기판을 디자인한다. 전단과 마지막 증폭기를 여러 가지로 조합해 보니 3~4종의 기판이 디자인되었다. 작은 회사이다 보니 연구원들이 회로 설계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PCB기판과 그에 맞는 간단한 기구까지는 직접 설계를 해야 한다. 나중에 납땜하고 조립하고 시험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완전 일당 백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덕분에(?) 회로 설계, PCB 디자인, 기구 설계에 필요한 툴까지 사용법을 익히고 쓸 수 있게 되었다.
PCB 제작업체와 기구 제작업체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들어오면 조립하고 시험을 한다. 개발이 끝나고 모든 부품이 확정되는 양산단계에서는 업체를 이용하여 기계를 통해 자동으로 부품을 PCB에 올리지만 수시로 부품을 바꿔달고 시험을 해야 하는 개발단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모든 부품으로 하나하나 남 땜해야 한다. 이를 통해 납땜실력이 늘어나는 것은 기본이고, 쉽고 편한 테스트를 위해 다음번에는 pcb기판을 그리고 기구를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가 자연스럽게 습득된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시험하기 위한 본능의 결과로 실력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조립 후 시험을 해본다. 주요 규격들을 쭉 확인한다. 다른 규격들은 다 만족하지만 예상대로 정해진 소비 전력 내에서 출력레벨과 동시에 이 출력신호특성이 얼마나 깨끗한지를 알려주는 규격을 맞추지 못했다. 조립하며 놓친 건 없는지, 같은 기판을 여러 번 조립해보기도 하고, 무한 튜닝을 시도해 보기도 한다. 마지막 증폭기로 사용할 수 있는 부품은 몇 가지로 정해져 있으니 여러 가지 방법과 조합으로 기판을 다시 설계하여 제작해보기도 했다. 튜닝하다 시험하다 새로운 기판이 들어오면 다시 조립하고 튜닝하고…. 야근과 밤샘의 반복이다.
처음 경험하는 야근과 주말 출근과 때로는 밤샘으로 분명 몸은 힘들었겠지만 그 시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기억은 거의 없다. 그땐 젊었고 열정이 있었고 옆에 든든한 남자친구가 있었고 나하나만 신경 쓰면 되는, 지금 생각해서는 제일 맘 편하고 행복했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 한 가지 규격을 만족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 상태에서 정해진 BMT 날짜는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