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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율 Apr 26. 2023

납땜하는 여자-10화 첫 개발 미션 2


BMT 날짜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여전히 규격 하나는 문제가 되고 있었고, 해볼 건 다 해봤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건 규격 하나라고 할 수도 없었다. 3가지 수치로 이루어지는 이 규격에서 중요한 2개의 수치는 만족하고 있었고 나머지 1개만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성능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수치도 아니고, 단지 기존 규격이기 때문에 맞추어야 하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엠프 성능은 문제없이 잘 나오는 데, 사용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데, 모든 규격을 만족시켜야만 하는 상황이 불필요하게만 느껴졌다. 엠프 개발은 여기서 더 이상 진행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경쟁사 또한 우리와 똑같은 이 규격 하나를 만족시키지 못해서 애를 먹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대로 BMT를 진행해서 두 회사 모두 같은 항목의 같은 규격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결국, 두 회사는 이 사업을 나눠서 가져가거나 또는 가격으로 승부를 해야 한다. 아니면, 다른 규격을 누가 더 좋은 성능으로 만족시켰는지를 판단하여 양산 물량의 비중을 정할 수도 있다. 그 뒤에는 어떻게 사업이 진행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고, 오로지 회사 영업력과 협상능력에 따라 정해지게 된다. BMT 실패 이후엔 개발자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어찌 되었든 똑같은 제품을 두 회사가 생산하는 건 그만큼 비효율적인 방법일 테니 두 회사 모두 끝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남은 시간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이 시간을 계속 문제가 되는 규격 하나만을 잡고 늘어질지, 아니면 이것은 깨끗이 포기하고 다른 성능을 더 좋게 하기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지를 전략적으로 고민해야 했다. 

이대로 사업을 나눠서 가져가기엔 지금까지 한 노력이 아까웠고, 보장된 수익을 놓치는 게 아쉬웠다. 나중에 개발에 뛰어든 경쟁사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것 같아 억울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 모든 이유를 우선하는 건 무엇보다 개발자들의 개인적인 자존심과 처음 개발을 시작한 회사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개발이란 걸 처음 경험하면서, 비록 개발 보조의 역할을 하고 있던 나였지만 BMT라는 것에서 꼭 이기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간절했다. 


내 마음이 이 정도인데 개발 총책임자인 연구소장님과 과장님은 개발에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끝까지 문제가 되는 규격을 포기하기 않기로 마음먹은 연구 소장님은 그동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주변 지인들을 물색해 왔었는데, 그러던 중 엠프 쪽 실무 경험이 많은 과장님 지인이었던 박사과정의 한 분, 지금은 조그만 회사를 하나 운영하시는 대표님과 정식 기술 고문 계약을 하고 그분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함께하게 된 그 대표님과 상세 규격, 개발 과정, 지금까지 진행사항과 시행착오들, 문제점들을 공유했다. 며칠 안 남은 상황에서 그분은 여러 종류의 시제품 중 제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두 개 정도만 챙겨서 본인의 사무실 겸 조그마한 시제작실로 가지고 가셨다. 그분의 지휘아래 내 사수가 이제는 개발 보조가 되어 2~3일을 그 시제작실에서 지냈다. 


하루 이틀 밤을 새우고, 퇴근했다가 일단 회사로 출근을 했던 아침, 연락이 왔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애를 먹이던, 도저히 잡히지 않을 것 같던 그 규격을 잡았으니 와서 확인해 보라는 그 대표님의 전화였다. 


그게 잡힐 수 있는 규격인지, 과연 가능한 건지, 그동안 여러 번을 설계해서 시험해 보고 튜닝해 봐도 전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는데 과연 진짜 잡힌 게 맞는지, 잡았다면 그동안 사수와 나는 뭘 놓치고 있었던 건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그 대표님 사무실로 뛰어갔다. 


계측기로 보이는 성능을 확인해 보니, 와… 진짜 그 규격이 잡혀있었다. 비록 마진 없이 간당 간당한 수준이긴 했지만 그동안 매번 봐왔던, 문제가 되는 신호 파형이 아니라 3가지 수치의 규격을 모두 만족시키는 너무나 예쁜 모양의 파형이 화면에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궁금했다. 그분 말씀은 엠프를 제조사에서 추천하는 방법 즉 datasheet에서 요구하는 조건대로 동작시키지 않고, 설정 조건을 변형시켜 보았다고 하셨다. 아… 이렇게도 성능을 뽑아낼 수 있구나. 그동안 우리는 datasheet에 주어진 조건 내에서만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었다. 주어진 조건에서 뭘 놓치거나 잘못한 게 없을까를 내내 살펴보았던 사수와 나로서는 아무리 해도 이 규격을 만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게 노하우고 경험이고 연륜인가 보다. 물론 이 조건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성능 규격을 다시 하나하나 잡아서 확인하고 튜닝을 해야 하고, 마진도 어느 정도 확보해야 하지만 이는 시간이 필요한 일 일 뿐이었다. 


결국 BMT는 무사히 끝났다. 경쟁 회사의 담당 이사님도 이 수치를 우리 회사 제품이 만족했다는 걸 파형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어하셨다고 한다. 그 이사님은 두 회사 모두 그 규격을 못 맞출 걸 대비하여 여러 가지 영업전략을 들고 나오셨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규격을 다 맞춘 우리 회사제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규격을 놓친 그 회사에서 양산 물량을 일부라도 가져갈 명분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원망스럽고 불합리하다고 느껴졌던 BMT 합격 기준이 이때만큼은 참 고맙고 든든하다고 느껴졌다. 


참으로 짜릿했던 순간이었다. 


튜너와 엠프 모듈 2종의 양산 사업권은 우리 회사가 모두 독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우리 회사는 아파트형 공장도 분양받아 좀 더 좋은 업무 환경으로 이사를 갔고, 10여 명이던 회사 직원을 30명대로 늘리면서 한 단계 회사 규모를 키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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