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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율 Apr 21. 2023

이방인

알베프 카뮈(윤예지 그림 유기환 옮김)/현대지성

대부분의 고전이 그러하듯, 이 책 또한 제목은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봐서 익숙하지만 내용은 전혀 몰랐던 책 중의 하나였다. 역시나 대부분의 고전이 그러하듯, 쉽지 않은 내용에 진도는 잘 나가지 않고 주인공의 행동은 내 기준에서 도통 이해하기도 어려워, 책이 두껍지 않고 중간중간 컬러 일러스트까지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독서 모임 전까지 겨우겨우 읽어낸 책이다. 내 독서 수준에서는 아직까지 고전은 혼자의 의지만으로는 완독 하기가 어렵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 책인 셈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책 뒤에 이 책을 번역한 교수님이 마치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뭔가 찜찜하고 이상하고 내용이 몰입과 이해가 안 되어 한없이 작아져 버린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친절한 설명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들을 해설해주고 있어서 이런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모름지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이와 같은 문장으로 요약되는 이 책은 우연히 아랍인을 살해한 주인공 뫼르소가 법정에 섰을 때, 실제 사건 경위와 상관없이 예전 장례식장에서 그가 한 행동, 즉 의례 사람들이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자식이라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나 준칙에 맞는 행동을 뫼르소가 보여주지 않은 것에 대해 뫼르소에게 죄를 확정하고 사형을 내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상황을 인지한 주인공 뫼르소는, 비록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끼지도 하지만 결국 끝까지 사회가 원하는 행동, 즉 위선이나 가면을 쓰는 대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행동함으로써,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편안함을 느끼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교회, 보도 위의 동네 사람들, 무덤 위의 붉은 제라늄꽃, 페레 영감의 기절(마치 해체된 꼭두각시 같았다.), 엄마의 관 위에 떨어지던 핏빛 흙, 거기에 뒤섞이던 나무뿌리들의 하얀 속살, 사람들, 목소리들, 마을, 카페 앞에서의 기다림, 끝없이 털털거리던 엔진 소리 그리고 버스가 알제의 불빛 둥지로 들어갔을 때, 그리하여 12시간 동안 실컷 잠을 자리라고 생각했을 때 솟구치던 나의 기쁨이 떠오른다.'


어머니 장례식장 마지막을 설명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3년 전 아빠의 장례식 때가 떠올랐다. 아이가 막 5살이어서 회사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힘들었었던 때였고, 그다지 좋은 기억이 별로 없었던 아빠를 보내드리는 마지막 날, 월화수목 4일을 출근했고 금토일 3일장 동안 많은 손님들을 치르느라 너무 피곤한 상태에서 아침 일찍 발인을 위해 장례식장을 출발해 화장터를 지나 납골당에 아빠를 보내드리고 집에 오면서였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집에 가서 잠을 좀 잘 수 있겠구나’라는 똑같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장례식 분위기와 주위 상황을 묘사하다가 이와는 너무나 상반된 뫼르소의 감정을 ‘솟구치는 기쁨’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보여준 부분이 섬뜩할 정도로 그때 내가 느꼈던 기분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그래서였는지 어머니 장례식에 대한 행동만으로는 뫼르소가 그렇게 이질적이고 낯설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몽을 도와 그의 아내의 폭력에 가담하고 증인역할을 해주고 아랍인을 살해하는 과정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여자친구 마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이나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있고 싶어 하거나 육체적 관계를 원하는 것, 살라마노가 동물을 학대하는 모습 등은 공감은커녕 나와는 그냥 다른 사람이구나 하고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결국, 레몽을 따라가게 된 여행지에서 의도치 않게 아랍인을 살해한 죄로 뫼르소는 감옥에 가고 재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판시간을 할애한 질문들은 뫼르소에게 아랍인 살해에 대해 의도가 있었는지 상황이 어땠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어머니 장례식에서의 태도, 장례식 후 코미디 영화를 보고 여자친구와 잠자리를 한 사실 확인뿐이다. 사회에서 추구하는 도덕적인 의례를 따르지 않았고, 예심에서 판사가 요구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종교적인 의례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이미 뫼로 소는 실제 살해를 했는지와는 상관없이 죄인이 되었고, 모두 그 결론을 정해놓은 채 재판이 이루어졌고 실제 그렇게 결론이 났다.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뫼르소는 분위기를 점점 이해하기 시작했고, 어떤 상황인지를 깨달아가게 된다. 물론 이런 뫼르소의 모습들을 내외적으로 묘사를 하며 보여주는 부분들은 솔직히 어렵고 몰입해서 읽기가 힘들었다. 

 

생각과 마음이 닿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사회에서 요구되는 거짓된 의례나 형식, 위선을 거부한 주인공 뫼르소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장에 있던 법조인들과 배심원들, 그리고 뫼르소에게 친근하게 굴었던 주위 사람들조차 증인석에 나와서는 그런 뫼르소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죄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평상시 뫼르소의 도덕성으로 재판에서 뫼르소는 사형을 받은 셈이다. 뫼르소는  기성질서와 고정관념에 위배된 행동을 뫼르소가 했고, 이를 바로잡아주려고 예심판사든 부속사제든 변호사든 기회를 주지만 끝까지 뫼르소는 사실 마음과 다른 위선을 거부했다.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동안 뫼르소는 마지막 교도소 부속사제가 면회를 왔을 때 부조리를 아직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제를 향해 한차례 극도의 분노를 퍼붓는 일이 발생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부속사제에게 한바탕 분노를 퍼붓는 대목이다.  주인공 뫼르소가 얼마나 솔직하고 위선적이지 않은지를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뭐가 중요해, 당신의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이 뭐가 중요해'


그 사건 이후 뫼르소는 한결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이제 나는 왜 엄마가 삶이 끝날 무렵에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엄마가 삶을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거기, 거기서도, 뭇 생명이 꺼져가는 양로원 주위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욕망이 일었음이 틀림없었다. (중략)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내게서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비워준 듯, 신호와 별들이 가득한 밤의 어둠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가슴을 열였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고 그토록 형제 같으매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나를 되돌아본다. 난 지금까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하며 살고 있었을까. 내면의 나를 난 얼마나 존중해 주며 살고 있을까. 둘째인 나는, 둘째가 성격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얘기하고 다니기도 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맞추며 그렇게 무난하게 무던하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어느 것에 우선이든 다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다만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인지하고 나아지려고 노력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게 만드는 독서가 그래서 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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