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Deep Purple-Machine Head(1972)
2008년,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학교 축제였는지 문화제였는지 뭔지가 있었는데 당시 저는 그해 초 기타를 구입하고, 제대로 배우지는 못한 채 방구석에서 가끔 연습이나 하던 정도의 기타리스트였죠. 그리고 기타밖에 만져본 적이 없는 베이시스트, 드럼을 처음 다뤄본다는 드러머와 함께 밴드를 결성해서 그 축제였는지 문화제였는지에 나갔습니다. 제가 뭔 자신감으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공연 한 달 전에 급조된 밴드였던 데다가 멤버들의 실력도 형편없었기에 저희는 최대한 단순하면서도 인상적인 곡을 연주하려 했습니다. 두 곡을 메들리로 연주했는데, 공연이 끝나고 며칠 뒤 같은 학년이었던 아이 한 명이 와서 제게 묻더군요.
‘두 번째 곡이 정말 좋았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무슨 곡인지 알려줄 수 있냐’
전 대답했습니다. ‘딥 퍼플의 「Smoke On The Water」다’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드 록에 관심이 없으시더라도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곡이 바로 「Smoke On The Water」입니다. 이 곡의 유명한 기타 리프(반복 악절)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간결함과 힘을 자랑하죠.
딥 퍼플은 70년대, 레드 제플린과 함께 하드 록계를 양분하며 인기를 누렸던 밴드입니다. 이들은 기네스북에서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밴드’로 꼽히기도 했으며(70년대 초 기준입니다) 향후 수십 년 동안, 그리고 현재에도 메탈 음악계 전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죠.
딥 퍼플은 1967년 드러머이자 보컬인 크리스 커티스(Chris Curtis)에 의해 결성되었으며, 곧바로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와 키보디스트 존 로드(Jon Lord)가 합류합니다. 커티스는 약물중독이 심했기에 결성 멤버였음에도 불구하고 해고되었고, 이후 새로운 멤버들을 받아들이면서 딥 퍼플은 최종적으로 기타-키보드-보컬-베이스-드럼의 5인조 라인업으로 1968년 데뷔하게 됩니다.
딥 퍼플은 멤버 교체가 잦았는데, 멤버 교체에 따라 음악 스타일이 조금씩 달라졌기에 구성 멤버에 따라 딥 퍼플 1기, 2기, ...이렇게 구분해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클래식을 전공한 해몬드 오르간 연주자 존 로드가 주축이었던 1기, 즉 데뷔 당시의 딥 퍼플은 고전적인 양식미가 물씬 느껴지는, 프로그레시브 록(장대한 구성과 복잡한 연주, 지적인 주제의식 등 예술성에 중점을 둔 록 음악)에 가까운 음악을 했습니다. 프로그레시브 취향의 팬들은 이 시기의 딥 퍼플을 최고로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딥 퍼플이 메탈 음악 전반에 영향력을 끼치는 밴드가 된 것은 보컬을 이안 길런(Ian Gillan), 베이시스트를 로저 글로버(Roger Glover)로 교체한 뒤인 2기 시절의 음악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가 음악적 주축이 되어 날렵하고 직선적이며, 헤비한 본격적인 하드 록을 선보였지요. 이번에 이야기할 『Machine Head』는 바로 이 시기의 앨범입니다.
2기 딥 퍼플의 음악은 스타일 자체는 직선적인 리듬&블루스(재즈와 블루스를 결합한 음악 장르. 록 음악의 탄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이지만, 멤버들의 뛰어난 연주력과 키보드의 비중이 큰 편곡은 이들을 다른 하드 록 밴드들과 차별화시켰습니다.
먼저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는 딥 퍼플 결성 이전부터 영국 록 음악계에서 유명한 세션 기타리스트였습니다. 역시 세션 기타리스트였고, 레드 제플린을 결성한 지미 페이지와는 자연스럽게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죠. 그러나 즉흥성이 짙은 지미 페이지와는 달리, 리치 블랙모어는 절도 있고 계산된 연주를 펼칩니다. 그러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연주입니다. 또한 지미 페이지가 블루스·포크적인 영향을 드러낸다면, 리치 블랙모어의 솔로 연주에서는 서양 고전음악(클래식) 스타일이 나타납니다. 이는 나중에 이야기할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 등의 네오 클래시컬 메탈(Neo-Classical Metal)에 큰 영향을 줍니다.
공격적이고 날카로우며, 직선적이고, 곡의 구성에 맞춰 집중력을 심화시키는 블랙모어의 연주는 ‘가장 정통적인 록 기타’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대의 많은 기타리스트들이 그의 스타일을 따라하기 위해 노력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키보디스트 존 로드는 비록 1기 때보다는 비중이 줄어들었지만 역시 연주와 편곡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딥 퍼플이 동시대의 다른 하드 록 밴드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점이 키보드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죠. 기타 못지않게 묵직하며 화려한 로드의 연주는 서양 고전음악의 양식을 가져와 딥 퍼플의 음악을 더욱 웅장하게 만들었고, 메탈 음악을 정의하는 또 하나의 특성인 ‘고전미가 느껴지는 드라마틱함’을 후배 밴드들에게 각인시켰습니다.
보컬 이안 길런은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에서 초대 예수 역을 맡았던 보컬입니다. 길런은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와 함께 풍부한 성량과 고음역대를 소화하는 능력으로 하드 록·헤비메탈 보컬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참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예수를 대중에게 진정으로 이해받지 못하는 슈퍼스타로 묘사한 뮤지컬입니다. 이렇게 재해석된 예수에 딱 어울리는 인물은 비틀즈의 존 레논(John Lennon)이었고, 실제로 초대 예수 역을 가장 먼저 제의받은 이도 레논이었죠. 그러나 레논은 자신의 연인 오노 요코(Ono Yoko)가 막달라 마리아 역을 맡아야 한다는 해괴한 조건을 내걸었고, 뮤지컬 연출진 측은 그 조건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길런에게 예수 역이 돌아가게 됩니다.]
Deep Purple 『Machine Head』(1972)
메탈의 구조적 형식의 완성
01 Highway Star (추천)
02 Maybe I’m A Leo
03 Pictures Of Home (추천)
04 Never Before
05 Smoke On The Water (추천)
06 Lazy
07 Space Truckin’
이들 2기 딥 퍼플의 초기 걸작으로는 『Deep Purple In Rock』(1970)이 있는데, 이 앨범에는 딥 퍼플의 작품들 중 가장 공격성이 강한 음악이 담겨있습니다. 『Machine Head』는 공격성은 덜하지만 보다 정돈되어 있고 완성도 또한 높으며,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기타 리프로 시작하는 「Smoke On The Water」가 수록되어있는 앨범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딥 퍼플의 앨범들 중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앨범이죠.
첫 곡인 「Highway Star」의 기타 속주 솔로는 지금까지도 리치 블랙모어를 따라하는 기타리스트들을 낳고 있습니다. 블랙모어의 장기인 빠른 3연음 피킹과 계산된 구성력이 돋보이는 곡이죠. 「Smoke On The Water」, 『Deep Purple In Rock』 수록곡인 「Child In Time」과 함께 가장 유명한 딥 퍼플의 곡입니다.
「Highway Star」만큼은 아니지만 유려한 속도감이 돋보이는 「Pictures Of Home」은 훵크(Funk)스러운 「Never Before」로 이어집니다.
수많은 기타리스트들과 우리나라의 일반 대중들에게 딥 퍼플이란 이름을 각인시킨 곡은 바로 「Smoke On The Water」일 겁니다. 이 곡의 가사는 이안 길런이 그들이 녹음할 스튜디오 옆 카지노를 태워버린 화재를 보고 즉석에서 썼다는군요.
[참고: 「Smoke On The Water」의 가사에는 프랭크 자파 앤 더 마더스(Frank Zappa And The Mothers)라는 이들이 언급됩니다. 프랭크 자파는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적) 스타일로 유명한 록 음악계의 기인(奇人)으로, 더 마더스는 자파의 백밴드인 더 마더스 오브 인벤션(The Mothers Of Invention)을 가리킵니다.
딥 퍼플은 『Machine Head』 녹음 당시 스위스 제네바의 호숫가에서 지냈는데, 그들이 지내던 숙소 겸 스튜디오 옆의 호텔에서 마침 프랭크 자파가 백밴드와 함께 공연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텔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누군가가 카지노에 대형 화재를 일으켰고, 멀리서 보니 마치 호수 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는군요.]
『Machine Head』는 굉장히 헤비한 키보드 연주가 주도하는 강한 비트의 「Space Trunkin’」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본작은 하드 록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연주와 클래시컬한 구성미로 메탈 음악계에 영원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멤버 교체가 잦았던 딥 퍼플에서 2기가 가장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Machine Head』 바로 다음에 발표된 딥 퍼플의 음반은 『Made In Japan』이라는 라이브 앨범인데, 보컬의 상태가 약간 안 좋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딥 퍼플 멤버들의 훌륭한 연주력을 유감없이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앞서 딥 퍼플이 레드 제플린과 달리 즉흥적이기보다는 계산된 구성의 연주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즉흥연주를 못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 이들이 라이브에서 자주 선보였던 기타·키보드 즉흥 솔로 연주 배틀은 현재에도 많은 메탈 밴드들이 따라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레드 제플린보다 딥 퍼플의 인기가 높습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레드 제플린이 비교적 정통적인 블루스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아니면 3기 딥 퍼플이 「Soldier Of Fortune」이라는 훌륭한 록발라드를 만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죠.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딥 퍼플은 멤버 교체가 잦았는데, 딥 퍼플을 거쳐간 멤버가 다른 밴드를 결성하고, 그 밴드의 다른 멤버는 또 어디 밴드에서 활동하고... 이런 식으로 딥 퍼플 멤버들과 관련 뮤지션들의 이합집산을 다 외우는 것만으로도 하드 록·메탈 음악 계보의 절반은 안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리치 블랙모어가 결성하고 로니 제임스 디오(Ronnie James Dio) 등의 보컬이 거쳐간 레인보우(Rainbow), 3기 딥 퍼플의 보컬이었던 데이비드 커버데일(David Coverdale)이 결성한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 등이 있죠.
딥 퍼플은 1976년 4기 때 해체되고(당시의 기타리스트는 토미 볼린Tommy Bolin이었습니다), 1984년 2기 때의 멤버로 재결성되나 전성기에 훨씬 못 미치는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성격 안 좋기로 유명한) 리치 블랙모어가 다른 멤버들과의 불화로 몇 년 안 있어 다시 탈퇴하죠. 딥 퍼플은 요즘도 활동 중이지만, 현재 1, 2기의 핵심 멤버였던 리치 블랙모어와 존 로드 둘 다 없는 상태고 남아있는 멤버들의 기량도 현저히 저하된 상태입니다. 이젠 보수적인 평론가들이 아니면 딥 퍼플의 신보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죠.
『Machine Head』는 그들 최고의 시절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