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되찾은 일상

좋은 하루 13화

by Ryan

"두고 가는 거 없지?"

어머니께선 가방 지퍼를 닫고 침대 주변을 두리번거리셨다.

충전기, 지갑, 폰...

폰이 어디 갔지? 아 손에 들고 있구나.

"다 챙겼어. 가자."

나는 환자복을 개어 침대에 올려두고 병실을 나섰다.


주차장을 나와 창문 밖을 보니 새하얗게 눈이 쌓여있었다.

패딩을 입은 사람들은 몸을 웅크린 채 어딘가로 분주하게 향하고 있었다.

철길을 따라 지나가는 한강. 한강은 언제나 봐도 예쁜 것 같다.

마치 아주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듯, 집 문을 열자 포근한 공기와 익숙한 냄새가 나를 맞이해 줬다.

“다녀왔습니다.”


얼마 안 가 누나도 집으로 왔다.

원래 수술 일정에 맞춰 들어오려 했지만, 수술이 앞당겨지면서 퇴원한 뒤 오게 됐다.

내가 암 판정을 받자마자 곧장 달려온 누나.

그 마음이 지금도 고맙기만 하다.

낮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미국 시간에 맞춰 일을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렇게 오랜만에 세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냈다.


누나가 오자 집안은 다시 시끌벅적 해졌다.

평소엔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며 스치듯 얼굴을 보곤 했는데,

다 함께 집에 있다 보니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순간이 앞으로 많지 않을 것 같아 함께 사진을 많이 남겼다.

사진 속에는 똑 닮은 세 사람이 지금도 웃고 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보다.


누나와는 오랜만에 많은 대화를 나눴다.

누나와 나누는 대화는 세월이 가면서 그 주제와 깊이가 달라지는 것 같다.

어린 시절엔 사소한 걸로 깔깔 웃었고,

10대 때는 으르렁대고 싸웠으며, 20대 때는 연애나 진로에 대해 털어놨었다.

30대가 된 지금, 우리는 커리어, 자녀계획, 그리고 건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세월이 흐를수록 대화가 깊어진다는 사실이 기쁘다.

무엇보다도, 몇십 년 동안 함께 이런 대화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것이 더없이 소중하다.

40대가 되면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기대가 된다.


어렸을 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디야? 나 1번 출구 앞에 있어.”

컨디션이 더욱 좋아져 여자친구와 데이트도 했다.

암병동은 면회가 금지되어 수술 후 처음 만난 터라 반가움이 더 컸다.

예전처럼 재밌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주로 음식 이야기를 했다.

초밥, 피자, 디저트...

함께 먹고 싶은 음식들을 위시리스트에 적었다.


손을 잡고 걸어가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곳을 보니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가까이 가니 노릇노릇 구워지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여자친구가 내 눈치를 보더니 하나 사도 괜찮겠냐는 표정을 지었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귀엽다.

결국 팥, 슈크림 맛을 하나씩 샀다.

호호 불면서 먹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한입 만 먹어보자.”

“괜찮겠어?”

“응. 한입은 괜찮을 거야.”

팥 맛 붕어빵을 조심스레 한입 베어 물었다.

허.. 허.. 뜨거웠지만 꼭꼭 씹어 삼켰다.

달콤하고 바삭했다.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한입 더 먹으려 했지만, 그녀가 안된다며 나를 말렸다.

아쉬웠지만 꾹 참았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숨이 차올랐다.

다 회복했다고 생각했지만 계단을 걷는 건 아직 무리인가 보다.

이상하게 배도 갑자기 꾸륵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붕어빵이 잘못된 것일까?

결국 환승역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완전히는 아니지만, 평범했던 일상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다.


며칠 뒤, 수술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진료실을 들어가는 발걸음이 제법 익숙해졌다.

"몸은 좀 어떠세요?" 교수님께서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수술 부위를 확인하시더니 이상이 없다며 몸에 붙어있던 거즈들을 떼어내셨다.

이제 샤워도 할 수 있겠구나.

일상의 조각들이 조금씩 맞춰지는 것 같다.


교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아 조직검사 결과를 알려주셨다.

"음...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는데요."

수술이 잘되었으니 심각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 3기...입니다.“

그렇게 안심할 상황은 아닙니다,라고 덧붙였다.

순간 숨이 막히고, 눈앞이 다시 아득해졌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3기는 2기에 비해 생존율이 뚝 떨어진다.

“항암치료를 반드시 받으셔야 합니다.”

교수님은 단호하게 항암치료를 권하셨다.


그 순간, 몇 주 전 그날이 떠올랐다.

처음 위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던 그 느낌.

하지만 이번엔 곧바로 정신을 붙잡고 주먹을 꽉 쥐었다.

슬퍼할 겨를은 없다.

나는 최대한 빨리 항암치료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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