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

좋은 하루 15화

by Ryan

구토가 멎자 몸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제자리를 찾았다기 보단,

컨디션이 나빠지는 속도가 '매우 빠름'에서 '조금 느림'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이대로라면 사이클 별로 일주일만 버티면 될 것 같았다.


가만히 소파에 누워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이렇게 자유로웠던 적이 있었나?’

항암치료가 무사히 끝나 다시 회사로 돌아가면, 이 시간들은 사라질 것이다.

분명 이 시간을 유튜브에만 쏟는다면 언젠가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2주 차부터는 뭔가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책장에 쑤셔 넣어놨던 피아노 교재와 자격증 책을 꺼냈다.

두 교재 모두 앞부분에만 필기가 가득하고, 50 페이지 즈음부터는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페이지를 넘겨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이걸 할 수 있을까?

2주 집중하더라도, 주사 맞고 1주일은 또 아무것도 못할 텐데, 학습 효과가 없는 거 아니야?'

'그럼 두 개를 한꺼번에 하는 것보다 하나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커리어에는 자격증을 따는 게 좋을 텐데.'


잡념들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하지만 곧바로 한 문장으로 말끔히 정리가 되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냥 둘 다 해보자!'


처음으로 득실을 따지지 않고 공부에 몰두했다.

성과를 내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반대로 성과를 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루틴에 얽매이지 않고 컨디션이 괜찮을 때 만 공부하다 보니 마음도 편안했다.


공부에 빠져 시간을 보내니 2차 항암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주사를 맞고 구토가 찾아왔을 때에도,

일주일 뒤에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텨냈다.

매번 피검사 결과도 좋았고, 무엇보다 뭔가에 빠져 있다 보니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이대로만 한다면 끝까지 잘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창문 밖을 보니 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산책로.

물가에는 윤슬이 반짝였고, 나무에는 가지마다 새순과 꽃들이 피어났다.

이제 추웠던 겨울이 지나 봄이온 것 같았다.

비록 나는 아직 겨울에 머물러있지만, 언젠가 나도 이들처럼 다시 피어나고 싶다.

하지만 올해는 내게 쭉 겨울일 것 같다.

내년이 오면...


내가 내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차수가 거듭되면서 몸에 약이 쌓인 것 같다.

몸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4차 항암부터는 주사를 맞기 전부터 손발 끝이 저려왔고, 주사통증도 심해졌다.

3차까진 괜찮았는데, 이제는 주사 맞은 팔은 들기도 버겁다.


세수를 하려고 거울을 볼 때마다 점점 야위어 가는 것 같다.

살이 급속도로 빠지니 얼굴을 조금만 찡그려도 주름이 가득 생긴다.

발바닥은 다 까져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사포 위를 걷는 느낌이다.

거울을 보고 싶지 않다.

냉장고에 방치되어 썩어가는 야채 같다.


항암제의 독성은 몸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망가뜨렸다.

암기한 공식들은 하루만 지나도 흩어져버렸다.

악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손끝이 저려와 연습과 필기가 어려웠다.

결국 피아노와 자격증 모두 중단했다.


할 수 있는 게 적어지다 보니,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공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요 주제는 삶과 죽음이다.


어느 날 갑자기 온 암처럼, 죽음도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삶은 왜 우리에게 주어졌을까?

이 또한 예고 없이 찾아온 것 같은데.

언제 끝날지도 모를 삶을 어떻게 살아야 진정 의미가 있을까?


삶이란 참 좋은 것이다.

맛있는 것을 먹고 커피 향을 맡으며 따스한 햇살을 만끽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기도 하고 때로는 울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어차피 죽을 거, 살아서 뭐 하나?

왜 괜히 삶이란 게 주어져서 이 고생을 하는 건가?

내가 애초에 태어나질 않았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 슬퍼하지 않을텐데.


그동안 잘못 살아온 것 같다.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던 걸까?

쌓아온 것들은 이리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남 눈치를 보며 살았을까?

나를 진심으로 신경 쓰는 사람은 몇 없는데.


아무리 곱씹어봐도 인생이란 것은 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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