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하루 16화
차가운 바닷바람이 볼을 스쳤다.
전 날의 비 때문인지 바다 위엔 해무가 깔려있었다.
하늘빛은 여전히 칙칙했지만,
바람과 함께 들리는 파도소리가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켜 줬다.
곧 5차 항암에 들어간다.
요즘 생각이 많아져서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부러 집에서 먼 곳으로 여자친구와 여행을 왔다.
평일이라 그런지 강릉에는 사람이 없었다.
경포대를 따라 길게 조성된 산책로에는 강아지 한 마리와 산책하는 사람만 보였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의 고요함은 덩달아 나까지 침착해지게 만들었다.
숙소에서 카페로 가려면, 늘어선 횟집들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야 했다.
후드 주머니에 꼭 맞잡은 손을 찔러 넣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카페로 걷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SNS에서 봤던 재밌는 영상.
어느새 우린 암 이야기는 꺼내지 않은 채, 일상 얘기만 하게 됐다.
대화를 하다 문득,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영종도에서 억지로 데이트를 즐기는 척 연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반년 정도 흘렀구나.
그땐 몇 기인지도 몰라, 그저 막막하기만 했는데.
“영종도에선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해무가 깔린 지평선을 바라보며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말했지? 돌아올 거라고. 항암치료도 잘 마무리되고 금방 끝날 거야.”
“그러게, 치료가 잘 되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녀는 웃으며 화답했다.
그녀는 여행 내내 웃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니 나 또한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녀도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했던 것 같다.
바다, 고요함, 사랑하는 사람.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이내 불안이 천천히 머릿속에서 번져 나갔다.
‘과연 이 행복이 지속될 수 있을까?’
설령 암이 재발된다면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또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잘 회복되더라도...
내가 부모라면 하나뿐인 딸이 암을 겪은 남자와 결혼한다는 걸 선뜻 응원할 수 있을까.
어느 쪽이던, 이 사람의 행복을 위해...
더 늦기 전에 내가 먼저 떠나 줘야 하는 건 아닐까.
이런 고민은 점점 더 커져갔다.
5차 항암 기간 중, 어머니께서 가족 기념일에 참석하시느라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보내신 적이 있다.
내 걱정에 망설이셨지만,
병간호에 지쳐 보이셔서 꼭 다녀오시라고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위기는 늘 무방비 상태에서 찾아오는 법이라 했던가.
그날 밤, 갑자기 누르는 듯한 복통이 밀려왔다.
처음엔 그저 소화불량이라 여겨 집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지만 오히려 통증은 더 심해졌다.
결국 배를 움켜쥔 채 혼자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통증은 계속 심해졌고,
집에서 불과 10분 거리인데도 도착이 멀게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항암치료 후 처음 겪는 증상이라 머릿속은 온통 불길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암이 재발한 것은 아닐까...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보호자가 필요했다.
시간을 보니 오후 11시 50분. 늦은 밤이다.
만약 어머니께 지금 연락드리면 받으실까?
근데 응급실이라고 하면 스스로를 자책하시며 앞으로 외출도 안 하실 텐데.
여자친구는 멀리 사는데.
지금 와달라고 하기엔 너무 늦은 거 같은데.
여자친구 부모님께서 왜 이 시간에 나가냐고 하시면 어떻게 설명하라고 해야 하지?
어떡하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나?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어떡해어떡해야해어떡해어떡하지어떡해
누르는 듯하던 통증은, 어느 순간부터 날카롭게 뱃속을 찔러댔다.
마치 장미 가시가 장 쪽을 긁고 지나가다 그 자리에서 멈춘 것 같았다.
겨우 택시를 내려 허리를 굽힌 채 식은땀을 닦으며 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응...”
“정말 미안한데, 지금 좀 와줄 수 있어?”
응급실로 들어간 후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검은색 집업 후드를 대충 걸치고 응급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왼쪽 팔 엔 주사가 꽂혀있었고 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미안해...”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반이었다.
여자친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얼굴엔 피곤이 가득해 보였지만 애써 숨기는 듯했다.
“괜찮아...? 심각한 건 아니래?”
“아직 모르겠어.”
팔에 꽂혀있는 주사를 타고 차가운 액체가 혈관을 타고 들어올 때, 항암주사의 싸한 감각이 떠올랐다.
곧바로 구역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때, 응급실 의사 선생님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환자 분, 괜찮으세요?”
“아직 통증이 좀...”
“엑스레이를 보니까,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니고요.”
그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통증도 갑자기 나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장 운동 문제라, 주사 다 맞으시면 가라앉을 거예요.”
잠시 누워있다가 약을 처방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지친 여자친구는 금세 잠이 들었지만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지금껏 모든 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암이란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