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역사를 바꾼 열두 가지 사건 사고. 아홉 번째 이야기
항공기 진동이 너무 심해서... Emergency Ditching(비상착수)을 해야 할 것 같아요....
2011년 7월의 어느 새벽, 인천공항을 이륙해 상하이로 향하던 아시아나항공 991편 부기장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이 말을 끝으로 관제탑과의 교신이 끊겼고, 991편 항공기는 제주 서쪽 100km 해상에 추락했다.
사고 직후, 정부는 기체 인양을 위해 현장 수색을 시작했고, 언론은 앞다퉈 기사를 쏟아냈다. 무엇보다 왜 갑작스레 항공기가 추락했는지에 대한 사고 원인에 모든 관심이 쏟아졌다. 국토교통부의 사고조사는 보통 몇 달이 소요되고, 망망대해에서 블랙박스로 불리는 비행기록장치를 건지지 못하는 이상 사고 원인을 밝혀내는 일은 요원하기 때문에 추측성 기사나 난무했다. 많은 언론이 10억이 넘는 조종사과 빚과 사고 전 가입한 30억대 사망보험금에 초점을 맞췄다.
이런 언론의 논조가 계속되자 아시아나 화물기 추락은 며칠 지나지 않아 보험금을 노린 고의사고가 되어버렸고, 조종사들은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혔다. 그리고는 대중은 공식적인 사고조사보고서가 나오기도 전에 이 사고에 대한 관심을 거뒀다.
사고 원인을 밝히기 위한 노력
국토부는 2015년 7월 31일에 아시아나 화물기 추락에 대한 공식 사고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사고가 발생한 지 만 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공식 보고서 발표가 늦어진 건 이 항공기의 블랙박스가 인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체가 바다 위에 추락하면서 산산조각 났고, 수 km에 걸쳐 파편이 흩어져 동체 인양은 고사하고 잔해 수거조차 쉽지 않았다.
블랙박스를 찾기 위해 저인망 쌍끌이 어선까지 동원해 제주 밑바닥을 훑었다. 1차 수색으로도 부족해 2차 수색까지 실시지만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2차 수색 마지막 날, 딱 한 번만 더 해보고 마치려 했던 수색에서 기적적으로 블랙박스를 건져냈다. 조사단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건져낸 블랙박스의 상태는 참담했다. 가장 중요한 데이터 저장장치는 사라졌고, 주황색인 본체는 온통 그을려 검게 변해 있었다. 결국 블랙박스를 통한 사고 원인 규명은 불가능해졌고, 여러 정황과 증거를 분석해서 원인을 추정해야 했기에 4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
리튬배터리의 발화
블랙박스가 나오지 않았기에 사고조사단은 수거한 잔해의 상태를 분석할 수 밖에 없었다. 화물칸 파편 안쪽과 조종석 연기 배출구 셔터에 그을음이 심해 기내 화재가 크게 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주요 탑재 화물에는 상당한 양의 리튬이온 배터리가 있었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자기기에 사용되는 리튬배터리 말이다. 명확한 증거가 없었기에 사고 원인을 리튬배터리의 발화로 지목할 순 없었다. 그래서 사고조사보고서에서도 의심만 할 뿐 이었다.
하지만 이 사고가 발생하기 딱 1년 전에 있었던 UPS 화물기의 화재 추락사고와 비교해보면 사고의 정황과 조종석에서의 상황 등이 너무나도 닮았다. UPS 006편 화물기는 다량의 리튬배터리를 싣고 두바이를 이륙한 지 22분 만에 추락했다. 당시 항공기는 화물칸에서 시작된 화재로 인해 주요 장치와 전선이 불에타 조종실에서 정상적인 제어가 불가능했다. 참사는 피할 수 없었다. 지상에 추락했기에 블랙박스는 즉시 회수되었고, 분석 결과 화재의 원인은 리튬배터리 발화로 밝혀졌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비록 사고조사보고서가 콕집어 말하진 못했지만, 아시아나 화물기 사고 원인이 리튬배터리라는 것은 심증을 넘어서 확증에 가까워진다.
기내에서 리튬배터리가 치명적인 이유
스마트폰으로부터 시작해 노트북, 보조배터리, 전자담배, 전자책, 태블릿 및 에어팟에도 리튬배터리가 들어간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충전해서 쓰는 모든 전자기기에 리튬배터리가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렇게 널리 쓰일 정도면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리튬배터리는 충격과 화재에 취약해 발화 및 폭발할 위험성이 항쟁 내재되어 있다. 그 위험은 지상에서보다 공중에서 몇 배는 더 크게 다가온다.
불이 난 리튬배터리는 물에 담그지 않는 한 언제든 재발화 할 수 있다. 표면에 있는 불을 끄더라도 배터리 자체 열을 낮춰주지 않으면 내부에서 열폭주가 일어나면서 다시 불이 붙어버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객실 내부에서 화재가 나면 승무원이 소화기로 불을 끄고 물을 부을 수라도 있지만, 화물칸에서의 화재는 이런 조치가 불가능하다. 항공기에 화물칸에 자동 소화기가 장착되어 있지만, 스프링클러처럼 물을 뿌리는 게 아니라 특수 기체를 방출해서 산소공급을 차단시켜 불을 끄는 방식이라 리튬배터리 화재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아시아나 화물기와 UPS 화물기의 화물칸 화재 대응이 어려웠던 것이다.
승객의 협조가 절실한 대책
이 문제를 예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리튬배터리를 기내에 들이지 않는 것이다. 가능할까? 모든 승객이 스마트폰, 스마트워치, 에어팟, 노트북 등 대부분의 문명 기기를 포기해야 한다. 휴대전화를 화물기로 미국에 수출하는 것도 금지돼서 몇 달씩 걸려 배로 운반해야 한다.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래서 내놓은 대책이 화물칸에 리튬배터리리 반입을 제한하는 것이다. 화물기로 리튬배터리를 나를 때는 충전량을 최소화해서 열폭주 가능성을 낮추고, 여객기의 경우 리튬배터리는 객실 내부로만 반입할 수 있게 했다. 객실에 반입하는 배터리의 용량과 수량도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보조배터리를 위탁수하물에 넣고 부치거나, 실수로 리튬배터리가 화물칸에 실린 게 뒤늦게 발견돼서 항공기가 회항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아직 많은 승객들은 항공종사자만큼 리튬배터리의 위험성과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근무 중에 기내에서 전자담배를 충전하는 승객에게 화재 위험이 있으니 충전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하면 눈을 흘기며 이 조그만 거 충전하는 게 뭐가 그리 위험하냐며 반문하는 경우가 이따금씩 있다. 조금은 불편하기 때로는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기내 화재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소화기를 들고 달려갈 승무원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자.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