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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연군 Feb 17. 2022

예수를 팔아버린 유다는 두 번 죽었다.

유다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 그리고 재평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도 예수의 12명의 제자 이름을 다 외우지는 못한다. 그중 베드로나 요한 같이 몇몇 유명한 이들의 이름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12제자 중 예수를 은 30전에 팔아버린 유다 만큼은 모든 기독교인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를 배신하지 않고 따르던 제자 이름을 기억 못해도 예수를 팔아버린 배신자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는 것이 아이러니다.

그림에서 후광이 없는 자가 바로 가롯 유다다.

가롯 유다는 예수의 열두 제자로 최후의 만찬도 함께 했던 예수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그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가롯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임을 알고 말하기까지 했다.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태 26:20-26)"


우리가 기린을 배신의 아이콘으로 여기는 것처럼 예수를 판 유다는 서양 문명에서 배신의 화신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당연히 배신자의 말로는 좋게 끝날 수 없는 법. 마태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인자를 파는 사람은 화를 당하고 만다. 

로마 병사에게 예수가 정체를 밀고하기 위해 입맞춤을 하는 유다.


스스로 목을 맨 유다?

마태복음 27장에서는 유다의 최후를 이렇게 전한다. 

유다의 최후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7:3-5)"


아무리 예수를 팔았지만 그래도 유다는 예수의 제자였다. 최후에는 본인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잠시 재물에 눈이 멀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죗값을 스스로 치렀다. 성경에서 주는 하나의 교훈인 셈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도 유다의 최후를 이렇게 기억한다. 하지만 성경엔 유다의 다른 최후의 모습도 기록되어 있다. 바로 사도행전에 말이다.



창자가 터져 죽은 유다?

사도행전 1장에서의 유다의 최후는 더 끔찍하고 비참하다. 

창자의 흘러내림을 강조했지만 곤두박질과는 거리가 멀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행 1:16-19)"


사도행전에서는 유다가 예수를 판 돈은 성소에 가져다 주었다는 말은 없다. 유다는 그 돈으로 땅을 샀다. 그리고 그 땅에서 몸이 곤두박질 쳐져 배가 터지고 창자가 흘러나와 죽었다. 유다의 죽음이라는 같은 사건을 두고 너무도 다른 결말이다. 마치 유다가 2명이 공범으로 예수를 팔아버려야만 말이 될 법할 정도로 큰 차이다. 



유다 죽음의 모순

예수를 팔아버린 유다가 천수를 다하면서 떵떵거리고 살았다는 말을 성경에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일반적인 권선징악의 심리와도 맞지 않다. 예수를 배반한 배신자의 말로는 참혹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는 사도행전의 결말이 속 시원하다. 끝까지 자신의 이속을 챙기던 유다는 결국 자기가 쌓은 재물 위에서 천벌을 받아 죽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교훈적이지는 않다. 복수심은 채워주지만 그래도 명색이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데, 자기반성조차 없다니. 마태복음은 이런 가려운 곳을 잘 긁어준다. 죄를 뉘우쳤고, 예수를 판 돈도 성소에 다시 가져왔고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두 이야기 모두가 진실일 수는 없다. 은 30전으로 땅을 샀다가 다시 팔아서 성소에 가져다주고 그 땅에서 목을 매었다가 떨어지고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올 수는 없다. 성경의 완전성이 훼손되는 부분이다. 이 때문인지 교회에서는 유다의 죽음을 주로 교훈적 내용이 담겨있는 마태복음의 사례를 들어 설교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 예수를 배반한 자의 끔찍한 말로를 강조하기 위해 사도행전의 내용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이야기를 비교해 가며 진실을 찾는 설교는 없다. 기독교에 대한 성도들의 의구심만 키우고 득이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유다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게 불편하고 껄끄러웠는지 요새는 유다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예수를 그냥 배신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도록 선한 쓰임을 받은 자라고 말이다. 유다가 없었다면 예수가 로마군에 잡혀갈 일도 없고, 십자가에 못 박히지도 않았고, 3일 만에 부활하는 기적도 없다. 부활의 기적이 없다면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하는 복음도 없다. 결국 유다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이뤘기 때문에 그는 배신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렇게 쓰임 받도록 창조된 것이라고.


얼핏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다는 도대체 어떻게 죽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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