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적은 누구인가?
주적은 누구인가?
장병 정신교육에 잊지 않고 등장하는 질문이다. 군이라는 거대한 조직은 어찌 보면 초등학생 같은 답을 요구할 때가 많다.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정권이 바뀌면서 변화하기도 하고 시대 흐름에 따라 달리 대답하기도 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까지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하고 물으면 누구나 "북한"이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다른 말을 했다가는 영화 1987에서 나온 남영동 건물로 조용히 끌려갔다. 북한이 주적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간첩밖에는 없었을 시기였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이끌고 육로로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한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에 이은 노무현 대통령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 정상회담을 진행할 정도로 남북관계가 발전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국방백서에서도 북한을 주적으로 표현하기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2004년 국방백서에서는 북한을 직접적으로 주적이라고 지칭하는 표현을 삭제하는 대신에 '현존하는 군사적 위협'이라고 기술했다. 당연히 국내 여론은 난리가 났다. 군인들의 정신무장이 허물어졌다며 당장이라도 적화통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았다.
남북화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급랭하기 시작했다. 천안함에 이은 연평도 포격으로 남북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박근혜 정권에서는 유일한 연결고리인 개성공단까지 폐쇄했다. 자연히 국방백서에서는 북한을 주적으로 다시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재인 정권에 들어서 남북 정상회담과 종전협정까지 논의되어 다시금 국방백서의 주적 표현 변경이 뜨거운 감자로 거론된다.
장병들 정신교육을 하다 보면 의외로 주적을 북한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일본이나 미국이 우리의 적이다라는 개념을 갖고 있는 장병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등으로 일본과의 마찰이 클수록 일본을 주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사소한 초등학생 논쟁 같지만 주적은 중요하다.
파워레인저처럼 우리는 정의롭고 악한 상대방을 때려잡는 일이라면 적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많이 복잡하다. 북한과 휴전선 155마일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고 심심치 않게 무력충돌이 일어난다. 최근까지 목함지뢰 도발이나 공동경비구역 귀순자 총격전과 같은 군사충돌이 계속되었다. 거기다 전 세계가 지탄하는 핵실험을 계속하는가 하면 남쪽에 대한 험악한 위협도 서슴지 않는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의 적이 누군지 명확하다.
하지만 북한 북한 전체를 마냥 '적'으로 간주하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북한은 통일의 대상이지 정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통일 한국을 대비한다면 북한 주민 모두를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또 북한을 적으로 상징하는 순간 남북교류나 화해 협력은 물 건너가는 상황이 된다.
문제는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가 대처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북한 주민은 포용하고 협력해야 하는 대상으로 장병들을 가르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북한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어떤 존재인가
북한과의 관계는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하다. 먼저 헌법에서 북한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헌법의 영토조항에서는 '대한민국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도 우리의 영토이다. 그렇기에 북한은 우리의 영토를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북한을 주체적인 정권이 아닌 꼭두각시 의미로 '괴뢰'라고 부른다.
국제법으로 보면 국가끼리는 상대방을 서로 자주적인 국가로 인정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이를 '국가승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독립했을 때 미국이 바로 국가승인을 해주면서 미국과 이스라엘을 국가대 국가 지위로 외교를 맺는다. 하지만 다른 중동 국가는 이스라엘에 국가승인을 하지 않았다.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우리와 북한은 서로 국가로 인정한 적이 없다. 그래서 개성공단으로 오가는 행위를 '출국/입국'이 아닌 '출경/입경'으로 표현한다. 단순히 경계를 넘었을 뿐 상대방 국가로 들어간 게 아니라는 말이다.
남북이 이것으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게 바로 UN가입이다. UN에 남한만이 단독 가입은 번번이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으로 막혔다. 북한의 단독가입은 중국과 러시아 말고는 협조해주는 곳이 없어서 이뤄지지 못했다. 남북한에게는 UN에 단독가입이 정통성 싸움과 같이 되어버려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동시 가입으로 합의가 되었고 1991년도 마침내 UN에 2달에 시차를 두고 남북한이 가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UN에 가입해 국제사회에서는 둘 다 모두 국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남북한 서로는 국가가 아닌 관계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남북한 정상이 모여 이룬 합의는 국가 간의 조약이 아닌 합의서에 그칠 수밖에 없다.
장교의 잘못된 인식은 부하들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결론을 위한 서론이 길었다. 복잡한 남북관계 그리고 대적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장교가 갖지 못한다면 그가 이끄는 부하들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장교가 잘못 알고 말하는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는 군에서 배운 올바른 지식으로 남아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다. 실제 전쟁이 났을 경우 옆의 전우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은 가득히 생긴다. 하지만 적개심으로는 전투는 할 수 있지만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 북한과 대치하면서 평화와 화합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군이 올바른 역할을 해야 하고 그 중추는 초급장교가 담당해야 한다.
하지만 한정된 ROTC 교육기간에 이러한 내용을 모두 배울 수도 알려줄 수도 없다. 예비 장교들 스스로가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 군대 격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멍청한 장교는 적군보다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