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진 저 | 유노북스
(21p) 운이란 좋고 나쁨이 없다. 운이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예정대로 달성하는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운이 좋다, 나쁘다'보다는 '운이 강하다, 약하다'는 표현이 보다 부합한다.
(25p) 결국 이루고자 하는 일을 예정대로 달성해 내는 강한 운을 부여받은 사람은 그만큼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한다. (중략) 이처럼 스트레스의 극단에까지 나아갔기 때문에 운이 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보다도 더 운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대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운이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자 하면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다.
(39p) 은나라의 점인들이 보기에 이 세상에 길흉이 존재하는 이유는 정(貞)한 사람이 이기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흉운이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중략) 만약 이 세상에 흉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태한 사람, 방만한 사람, 약삭빠른 사람들이 길운을 다 차지할 것이기 때문에 흉운을 섞어 넣음으로써 흉운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이기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이 세상의 구조라는 것이다.
(42~43p) 우리가 일상에서 '운명'이라는 말을 쓸 때는 어쩔 수 없는 일을 체념하여 받아들이는 경우를 지칭하는 수가 많다. (중략) 하지만 다소 좋지 않은 일을 나타낸다는 풀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를 '인간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을 나타낸다'라고 바꾸면 좀 더 원래의 뜻에 부합할 것이다. (중략) 운명의 작용에는 오만한 자의 무릎을 꺾고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세상의 신비를 보여주는 것이지 '좋지 않은 일'이 아니다.
(46~47p) 역경은 군자가 삶의 여행길에서 취할 기본적인 태도가 '곁에서 나란히 행하되 휩쓸리지 않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항상 공동체에 속해서 살아가는데, 주변 사람들과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면이 있어도 우선은 그들과 보조를 맞추어 '곁에서 나란히 행함'으로써 불필요한 갈등을 피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과 '휩쓸리지는 않음'으로써 자신을 지키라는 것이다.
(48p) 자기가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이라도 이겨 낼 수 있다. (중략) 이때 군자가 취하는 태도가 낙천(樂天), 즉 '하늘을 즐기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과 뜻이 통하지 않아 불편한 상황에서도 군자는 하늘의 도가 운행하고 있음을 알기에 낙천할 수 있다.
(50~51p) 천명을 따르면 운이 좋아진다. 명을 이루라고 주어진 힘이 운이며, 하늘이 나를 낳은 목적이 명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므로 나이 오십에 이른 이는 무엇보다 가고자 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이는 역경이 볼 때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다. 가고자 하는 바가 있어야 길흉의 질곡을 뚫고서 자신의 삶을 운전해 갈 수 있다. 그래야 삶이 표류하지 않을 수 있다.
(83p) 스스로 자신의 말에 합당한 삶의 궤적을 보여 온 그이기에, 그의 말은 여러모로 울림이 있다.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때 가장 서럽다. 자신의 팔자, 자신의 운명에 하늘의 큰 뜻이 담겨 있음을 느껴야 한다. 그러하면 자신에게 모질게 굴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은 모남이 있어서 비로소 자신의 할 일을 아는 것이다.
(98~99p) 결국 이십 대부터 사십 대까지 사람은 미로와 같은 이 세상을 아직 잘 모른다. 이십 대는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삼십 대는 다른 사람을 아직 잘 모른다. 사십 대에 이르면 세상 보는 눈이 조금 트이지만 아직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젊은 시절에 자꾸 운과 자기 기질에 치이는 것이다.
(99p) 그러다가 그 젊은 날의 열병이 여러 겹의 나이테를 남기고 지나갔을 때 비로소 오십이라는 원숙기에 이르는 것이다. (중략) 오십에 이른 이는 이제 자기 인생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오십이 하늘에 올랐다는 말이 이를 뜻하는 것이다. 자신의 기질을 넘어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이 가능하고 더 이상 운에 치이지도 않는다. 변덕스러운 우연에 휘둘리지 않으며 그 고삐를 틀어쥐고 주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오십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