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커브길만 돌면 돼, <우리의 마지막 여행>

The Last Journey (2024)

by 려한




“퇴직은 화려한 ‘제3의 인생’, 프랑스어로 ‘르 트와지엠 아쥬(Le Troisième Âge)’의 시작이죠. 저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제 앞엔 그런 삶이 펼쳐질 겁니다.”

프랑스어 교사 라스 하마르는 퇴직 후 여생을 자유와 여행으로 채우리라 선언하는 사람이었다. 은퇴식 날 제자들 앞에서 탭댄스를 추며, 새로운 삶의 문을 활짝 열 것이라 말하던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그 미소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제 그는 안락의자에 파묻혀 하루를 보내며, 삶의 의욕을 잃어간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아들 필립 하마르는, 아버지의 잃어버린 활기를 되찾게 해주기 위해 어린 시절 매년 함께 떠났던 프랑스 여행을 제안한다. 그는 아버지가 과거에 몰던 오렌지색 르노 자동차를 구하고, 절친인 프레드릭 비킹손과 함께 아버지와의 마지막 여행을 준비한다.



재연에서 수용으로

© 스웨덴영화제

이 영화가 초기에 택한 방식은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관찰이라기보다, 아버지의 시간을 복원하고자 하는 하나의 ‘재연’에 가깝다. 프랑스로 향하는 오렌지색 르노 자동차는 과거의 시간에 닿기 위해 연출된 서사적 장치이며, 라스가 사랑했던 프랑스의 경험을 되살리려는 시도다. 볼리외 해변 숙소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맞춰 벨라폰테 이야기를 하려는 상황이나, 프랑스식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가짜 다툼 장면, 그리고 제자들의 감사 메시지를 담은 깜짝 상영회도 그렇다.


하지만 여정이 진행될수록, 충실한 재연을 향한 시도는 한계에 부딪힌다. 라스는 자신을 전 유럽에서 최고의 라따뚜이 요리사라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피망 하나, 가지 하나조차 썰지 못한다. 떨리는 손끝과 흐릿해진 눈동자는 세월이 남긴 명백한 물리적 흔적이며, 이 흔적을 부정하는 대신 받아들이는 일이 이 영화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재연의 바람은 결국 불가능한 복원 앞에서 무력해지지만, 바로 그 무력함 속에서 '수용'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이 탄생한다.


그렇게 재연은 이 영화에서 한 사람의 생을 다시 불러내려는 시도였지만, 동시에 그 복원이 완전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계기로 확장된다. 필립이 처음에 계획한 여행은 아버지를 과거의 활기찬 모습으로 되살리기 위한 시도였지만, 결국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정으로 이동한다. 그는 아버지가 제대로 잔을 들어 음료를 마실 수 있기를 바라던 마음에서, 대신 빨대를 선물하는 마음으로 성장한다. 그렇게 이 여행은 재연에서 수용으로, 복원에서 이해로 나아간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 스웨덴영화제

여행의 끝에서 라스는 바닷가의 방파제 위로 난 길에 앉아 필립에게 나지막이 말한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그 말은 어쩌면 단지 그 공간에서만 유효한 말이 아니라, 삶을 향한 여운의 고백이다. 그는 여전히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 시간을 잠시 유예하고자 한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택한 ‘머무름’의 시간, 그것은 죽음에 저항하는 방식이 아니라, 생에 대한 감은의 표명이다.


<우리의 마지막 여행>은 결국 '복원'의 영화가 아니라 '관계의 재구성'의 영화다. 라스는 과거의 인연을 톺아보며 한 개인 존재로서 생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필립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쇠락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 그들이 진정으로 회복한 것은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현실을 대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라스가 변화한 신체를 받아들이듯, 필립 역시 아버지를 ‘다시 이전처럼’이 아닌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다.


삶이 변화하는 순간은 커브길을 통해 이루어진다. 라스가 볼리외 해변에 도착하기 직전 늘 말하던 "이 커브길만 돌면 돼."라는 말처럼, 그 커브만 돌면 어쩌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변화는 길 위에 있고,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서로를 믿으며 계속 나아가야 한다. 언제나 오늘의 여행이 '우리의 마지막 여행'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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