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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Dec 27. 2021

사회적 합의 수단의 정치적 남용이 불러올 미래

요즘 기사에 여론조사가 자주 거론된다. 조사 업체마다, 시기마다 결과가 제각각이니 이젠 통계라는 숫자도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 진실에 가깝다고 여겨진 ‘과학적 기법’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남용된다면 설득 수단이 남아날까? 아니 이미 이성적이기로 유명한 서구권은 설득이 불가능해 반포기 상태가 아닌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단체가 활성화되었고,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의 반발로 인해 코로나 팬데믹 때 큰 사회적 비용을 치뤘다.


현재 우리나라의 코로나 방역도 서구권과 비슷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K-방역이라고 외신에서 칭찬받던 우리나라에서 확진자가 몇 천 명씩 나오는 나날들은 일상이 되었다. 정부의 방역 정책에 협조적이던 국민들이 오랜 방역에 피로해진 탓으로 볼 수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에게도 방역은 서구권처럼 정치화되었으며 그렇기에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거슬러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영역이 되었다.


내가 본 문제의 악화일로 과정은 이랬다. 팬데믹 초반에 정부는 감염자가 속출하는 종교 시설 같은 곳은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 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을 어쩌겠나 싶지만 방역을 최우선 순위에 뒀다면 그들을 방치해서는 안 됐다. 이틈에 미디어가 기름을 부었다. 온라인에서 퍼지는 방역 관련 거짓 조작 정보를 반여당 성향의 일부 언론(이하 선동가)이 받아쓰며 방역 정책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의 정당성을 키웠다. 미디어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의 반발이 더욱 거세지자 정부는 더 단속을 하지 못했다. 이에 정부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비난 여론까지 높아지면서 정부 친위 언론들(이하 선동가)이 나섰다. ‘방역 반발자 대처’란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 해외 선진국보다 확진자가 적고 외신이 이렇게 우리를 칭찬하는데 반여당 세력이 악의를 품고 선량한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는 식으로 문제 회피 구실을 만들어 준 것이다. 결국 방역은 정치 진영싸움으로 치달았고, 그 사이 정부는 백신 접종에 올인했다. 하지만 이미 방역이 정치가 되면서 방역 담당자들의 과학적 기법과 당부는 정치 극단주의자들에게 닿지 못했다. 정상적인 언론 역시 정치화된 방역 문제를 다루기 조심스러워졌을 것이다. 결국 거리두기가 해제되자 해결되지 못하고 억눌린 문제들이 와르르 쏟아지면서 우리는 서구권과 비슷한 수준의 확진자와 사망자를 배출하는 지경에 이르려 한다.


1차적 책임은 정치인에 있다. 모두에게 욕먹기 싫고 언제나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싶은 정부와 여당의 욕심 탓이다. 누가 이런 사람들을 돕고 싶겠냐만은 그럼에도 주어진 정치적 책무를 방기한 현 야당들의 방관은 문제다. 코로나 방역에서 야당의 역할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가? 야당이 부재한 자리를 선동가들이 앞다퉈 채웠다. 2차적 책임은 이 선동가들에 있다. 한쪽은 여당의 욕심을 채우며 K-방역의 성과를 모두 정부 덕분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국민들이 동참해준 덕분이다) 다른 한쪽은 코로나 관련 거짓 조작 정보를 의혹 보도 하며 국민의 불안과 공포를 이끌었다. 그렇다. 양측은 서로 방역 실패의 책임을 덜기 위해 혹은 가중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며 진짜 문제를 가리며 사태가 악화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로 인한 피해는 오롯이 보통 사람의 몫이다. 이제 코로나 방역은 예전보다 더 적극적인 ‘주체성’이 아니면 실현하기 어려워졌다. 일본처럼 국민들 스스로가 조심하고 서로 멀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하자고 하지는 못할 듯 보인다. 이미 선동가들이 K-방역을 현 정부의 최대 정치 실적으로 치켜세웠기 때문이며 부드러운 가부장의 모습으로 권위를 세워온 현 여당이 구성원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모습은 자기이율배반이니까. 현재 일본인들의 주체적 방역은 일본 정부가 책임져주지 않은 경험적 공포가 행동 동기인 듯 보이는데, 우리의 동기는 왕이 되고 싶지만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될 것 같다.


한국인들은 똑똑하다. 코로나 방역과 마찬가지로 지금처럼 들쑥날쑥한 여론조사는 역으로 투표에 있어 중앙집권적인 언론이나 오피니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수평적인 네트워크나 주체성의 확대로 대체되지 않을까? 그래서 대선 판세 예측은 깜깜이다. 또한 그래서 후보자들이 신경써야 할 것은 선동가들의 프레임이 아니라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해결할 정치 철학과 비전을 정교화하고 실현해낼 능력이 있음을 보이는 일이다. 가령 이젠 모든 영역에서 불공정과 비상식의 원인으로 떠오른 경제 불평등의 적절한 해소를 위해 소상공인 피해보상액 100조를 지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산 가격 상승 원인으로 종종 거론되는 전국민 25만 원 지급은 문제적이고 항공 대기업 살리기에 8000억 원 쏟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현실에 일반인이 눈뜨고 있음을 직시하고 자산 기득권을 다룰 가능성의 역량을 보이는 것이다.


경제 불평등은 세계적 문제이다.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는 <광장과 타워>에서 2010년 대 벌어진 혁명인 아랍의 봄과 트럼프 당선을 놓고 전자는 불평등이 감소해서, 후자는 불평등이 커져서 벌어진 일이라고 분석했다. 두 사건 모두 일반인의 불평등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졌음을 드러낸다. 2008년 금융위기의 책임을 세계화로 미봉(彌縫)해온 대가이지 않나 싶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책임 없는 완전한 자유는 자유를 완전히 무너트린다고 했다. 미봉책을 덕지덕지 덧붙여 형성된 현재가 지속된다면 IT 기술을 통한 완전 검열의 미래에 닿지 않을까? 그때를 대비하며 자신의 학력으로 제2의 이방원을 꿈꾸는 한 청년이 보인다. 할많하않.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각성과 행동 변화가 먼저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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