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가 눅눅했다. 장마가 시작된 탓이었다. 임용고시를 포기했다. 그뿐이었는데 바쁘고 초조하던 일상이 놀랍도록 평온해졌다.
“너 언제까지 누워있을 거야. 오늘은 저것들 좀 정리하지?”
눈은 떴지만 계속 침대에 누워있는 내가 못마땅한지 엄마가 소리쳤다. 못 들은 척,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더 뭉그적거렸다간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또 하루 반나절이 지나갈 터였다. 엄마가 말하는 ‘저것들‘을 치우고자 비척비척 일어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임용고시 교재들. 1, 2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10년이 흘러있었다. 책상 바로 위에 있는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는 바람에 책상 위에 있던 남자 친구와 찍은 사진이 살짝 펄럭였다. 차갑고 습한 공기는 어느새 옷섶 깊은 곳까지 눅눅히 적셨다.
기간제 교사로 일하며 임용 준비를 하던 5년 전, 친구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남자 친구는 나보다 4살이 많았다. 그는 만난 지 1년을 넘기자마자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임용고시 붙고 나면.‘이 내 대답이었다. 다음 해, 그다음 해도 또 그다음 다음 해도 같았다.
“나랑 결혼하기가 싫은 거면 솔직하게 말을 해.”
오래 참았다고 생각했다. 자그마치 5년을. 자신이 말해놓고도 조금 후회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였다.
”하자. 결혼.“
내 한마디를 시작으로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결혼을 알리자, 부모님은 별다른 말 없이 건조한 반응이었지만 얼굴빛은 밝았다.
“뭘 멍하니 서 있어, 어서 치우지. 신혼집에도 가져갈 거야?”
엄마의 목소리가 나를 다시 책상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빗소리가 잘 들렸다. 누워있을 때만 해도 쏟아지던 빗줄기가 조금은 잦아들고 있었다. 빗소리를 노동요 삼아 책상 옆 책장에 꽂혀있는 교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봤었던 최신의 문제집부터 묵어있던 몇 년 전 교재들까지. 장마라 그런지 종이들도 꿉꿉하기만 했다.
며칠 전 남자 친구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그날에도 비가 왔었다.
“학원 차려 줄테니까 결혼이나 하라고 할 땐 안하더니.”
인사 자리에서 예비 시아버지가 어차피 할 거면 빨리했으면 더 좋지 않았겠냐며 한마디 하셨다. 돌아가던 차 안에서 어색한 침묵을 깨고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자기 아버지…좀 그랬어.”
“뭐가. 학원 차려줄 만한 돈이 지금은 없어지셨으니 안타까워서 하신 말인 거 같은데.”
가르치는 건 학원 강사도 보람차고 학교 선생님이랑 똑같은 거 아니냐는 그 말에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교재들을 손에 잡으니, 상념만 많아지는 것 같아 더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내가 왜 학교 선생님을 고집하고 있었더라. 기억이 희미했다. 지금까지 포기했던 많은 날들만 떠오를 뿐이었다. 차곡차곡 커다란 종이 상자에 그동안의 교재들을 담았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 담았다고 생각하면 어디선가 또 교재가 나왔다. 이제 진짜 다 마지막 권이라고 생각하며 들어 올린 건 10년 전 가장 처음에 구매했던 교재였다. 떨리는 손으로 표지를 넘겨보았다. 교재 제일 앞장에는 그 옛날 자신이 꾹꾹 눌러 적은 다짐이 쓰여져 있었다.
종이가 패이도록 눌러쓴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았다.
‘좋은 선생님이 되자.’
시간이 지나도 마르지 않는 것은 잉크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책 표지를 덮고 이 책도 그 상자에 넣을지 말지 고민에 빠졌다. 한참 생각하다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비가 그쳐 있었다.
“비도 그쳤네. 얼른 버리고 와. 엄마가 도와줘?”
“아니, 조금만 더 있다가……”
들고 있던 교재를 상자에 담으며 덧붙였다.
“장마가 끝나면, 그 땐 꼭 버릴게.”
몇 년 간의 교재들로 가득 찬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무거운 그 상자는 책상 밑에 다시 넣어두었다.
비는 그쳤지만 장마는 아직 한참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