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자려고 그래?"
엄마 목소리를 시작으로, 약간의 소란스러운 소음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부스스 눈을 살짝 떠 보니 할아버지댁 안방에 덩그러니 나와 내 동생 이불만 남아있었다.
어? 분명히 어제 나는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서 기절하듯 내 방 침대에서 잠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시골 큰집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 멋쩍게 웃으며 몸을 일으켜 침대 쪽을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꿈인가? 꿈인 걸까? 멍 하니 정신을 차리고 있지 못하자, 인내심의 한계가 온듯한 엄마가 소리쳤다.
"너네 둘 다 얼른 일어나서 이불 개고 씻고 와!"
씻고 오니 명절 밥상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밥상 앞에서도 어리둥절, 멍하니 있다가 맞은편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오로지 나와 할아버지만이 이 시간의 이질감을 감지한 듯했다.
아, 오늘 하루는 선물이구나.
보고 싶던 얼굴들을 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시간.
이건 할아버지가 가장 원하던 하루인 걸까? 설인지 추석인지 모를 어느 명절날의 아침이었다. 과거의 특정한 날이 아니라 새로운 어떤 날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 너무 보고 싶었어요!”
내가 갑자기 소리치자 다른 가족들이 모두 놀란 듯 쳐다보았다. 눈물까지 찔끔하자, 어른들은 ‘어머머, 쟤가 왜 저래?’ 하면서도 내가 귀여운 듯 웃었다.
아침상은 늘 그렇듯 각 형제들이 조금씩 해온 음식을 모아 차려졌다. 늘 명절마다 갈비찜은 우리 엄마 담당이었으니 이번도 그런 것 같았다. 엄마는 티 안 나게 할아버지 안색을 살핀다. "갈비찜이 최고로 맛있다." 엄마 얼굴에 기쁨이 얕게 번진다. 큰엄마 작은엄마 앞이기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억누르기 위한 노력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조금 웃었다.
금방 밥을 다 먹고 다음은 뭘 하지 생각했다. 할아버지께 특별하고 귀한 것을 해드리고 싶었다. 떠오르는 것들을 이것저것 두서없이 할아버지께 말씀드려 보았지만 할아버지는 “그냥 집에 있자.”며 빙긋이 웃으실 뿐이었다.
늘 그랬듯이 TV를 같이 본다.
서로 옆에 있는 것만을 느끼며, 별 이야기 없이.
"할아버지 오랜만에 같이 TV 봐서 좋아요."
계속 뭐라도 전하고 싶어 잠시동안은 마음이 들썩였지만 이내 나도 편안해졌다.
아침밥을 많이 먹은 아빠는 옆에서 코를 디링디링 골며 자고 있고 바깥 부엌에서는 세 며느리가 깔깔 웃으며 아침 먹은 뒷정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녀들이 왔다고 평소에는 잘 틀지 않는 보일러를 더울 정도로 올려놓아 방은 더없이 따끈따끈했다.
아마 오늘 밤까지 종일 이런 시간의 연속일 터였다. 밤에 잠들기 전 할아버지 침대 옆자리엔 평생 사랑인 할머니가 누워있고 침대 밑 방바닥엔 아들 며느리 손녀 둘이 요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곳.
불현듯 내 소망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농부로 살아온 할아버지가 평생을 일군 그 땅과 집에서 보내는 오늘 이 시간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할아버지의 마지막 기억이 되는 것이.
뜨겁고도 간절하게 바라던.
할아버지가 집이 아닌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신 게 계속 마음이 아팠습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기억이 따뜻한 시골집이였으면 좋았겠단 상상을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