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에서의 용기
어릴 적, 펼친 우산을 접다가 손톱을 찝힌 적이 있었다.
어찌나 아프던지 울컥 한 방울이 맺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부터 우산을 접을 때 마다 재빨리 손을 우산 안쪽에서 빼낸다.
손톱이 찝히지 않을 때 마다 안도의 한 숨이 저절로 나온다.
요즘은 옛날 처럼 손톱이 찝히는 그런 우산은 잘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일련의 관계들 끝엔 언제나 혼자였다.
그 끝에선 매번 그렇게 된 이유를 찾았고 그럴 때마다 마음속 울음을 다 썼다.
이후 나는 새로운 사람을 극도록 꺼려했고 관계에 굉장히 소극적인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싫었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갈구했다.
기억과 감정이 뒤섞여 결국 바닥을 찍고 겨우 심해에서 허우적대던 내가 헤어 나오게 만든 무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완벽하게 헤어 나오진 못한 듯. 그런데 완벽하게 헤어 나올 수 있나? 아무튼)
그리고 그 무언가는 의도치 않게 요즘의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다.
바로 '클라이밍'이다.
흔히 인싸운동으로 알려져 있는데
순도 99% 내향인이 이런 운동에 미쳐있다니 스스로 참 신기할 노릇이다.
미쳐있을 수 있는 건 아무도 보이지도 찾아오지도 않는 구석진 곳에서 사람들 눈을 피해 하고 있고
아직 인싸들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강습을 받는 암장은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곳이다.
어떠한 날엔 (거의 대부분의 날에) 걸어가기가 참 싫다.
그러던 어느 날, 강습받는 곳과 제휴되어 있는 20분 거리의 암장을 가보았다.
해당 암장은 동네의 자그마한 암장이었고 아이들이 많았다.
짐을 놓으며 암장을 눈으로 돌아보았다. 자그마한 암장이라 숨을 곳이 없었다.
눈앞에서 아이들은 닌자들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스트레칭을 하고 그나마 구석진 곳으로 쭈뼛쭈뼛 들어가 찔끔찔끔 쉬운 것만 골라서 문제를 풀었다.
아이들 앞에서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 문제에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탑 직전까지 도착했지만 정작 탑엔 손이 닿지 않는 것이다.
안간힘을 써서 닿아보려 했지만 한 끝 차이로 되지 않았다.
여러 번 탑 직전에서 탑까지 손만 뻗었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하던 때에 암장의 코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여러 번 도전하시던데 저기서 반동으로 뛰어서 잡아야 해요. 손을 놓아야 해요.
제가 봐줄 테니 다시 한번 해보세요"
손을 떼려면 힘찬 반동을 주면서 동시에 홀드를 잡고 있는 손을 놓아야 하는데 나는 그 자체가 무서웠다.
'손을 놓으면.... 떨어질 것 같은데...'
코치가 계속 봐주었지만 나는 끝끝내 무서워서 제대로 손을 놓지 못했다.
그날 나는 대부분의 문제를 탑 직전까지 간 것에 만족했다.
이후, 작은 암장에 자주 가곤 했다. 큰 암장에선 강습 때 빼곤 코치가 날 잘 봐주시지 않았는데
여기선 처음 본 나에게도 가르침을 주는 모습이 꽤나 내향인의 마음을 울렸다.
며칠 전 못 풀었던 문제에 또다시 도전했다. 역시나 잘 되지 않았다.
'아직 저 문제를 풀기엔 내 실력이 모자란가 봐. 역시 내 암리치는 짧아서 안되나봐' 하며
벤치에 가만히 앉아 문제만 멀뚱히 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선 아이 한 명이 코치에게 강습을 받고 있었다.
코치가 한 문제를 지목해 아이에게 해보라 말했다.
아이는 벽에 붙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못할 것 같은데'
그러자 코치가 넌지듯 내뱉었다.
된다고 생각해도 될까 말 까야. 그러니까 된다고, 무조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
자기 계발서 같은 말이다 싶으면서도 울렁커커컥- 마음이 버스럭거렸다.
그 말을 듣고 시도한 아이는 첫 시도에 바로 문제를 풀어냈다.
은연중에 나는 저 아이가 문제를 못 풀거라 생각했다.
난 항상 탑 직전에서 무서워, 못해, 안해 라고 항상 생각했기 때문에 남도 당연히 쉽지 않을꺼라 생각했다.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엔 이유가 참 많았다.
하루하루 살아내면서 점점 겁이 많아지고 불안도가 높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는 자연스레 아물어가지만
기억과 감정은 여전히 남아서 어디로든 손뻗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손을 뻗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얻는 건 없어도 적어도 날 지킬 수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키기는커녕 모든 상황에서 타협하고 좌절하는 나를 마주할 뿐이었다.
클라이밍에 '데드 포인트'라는 기술이 있다.
무중력 상태가 되는 순간에 홀드를 바꾸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다리에 반동을 주며 앉았다 일어나며 순간적으로 손을 놓으면
아주 찰나의 순간에 무중력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그 순간, 정말 찰나에 다음 홀드를 탁! 잡는 것이다.
실패도 성공도 손을 뻗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손을 놓고 뻗었으나 홀드를 잡지 못하면 계속 떨어지기도 하고 홀드에 손이 긁히기도 하겠지.
그러니 실패엔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것을 뚫어야 다음 스텝으로 갈 수 있다.
클라이밍도 몸이 붕 떴을 때, 가장 높은 곳에서 멈췄을 때, 다음 홀드를 잡을 수 있듯
무조건 된다고 생각하고 손을 놓고, 손을 뻗어서 다음 스텝을 움켜쥘 수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걸.
이제껏 몰랐을 리는 없고... 외면하고 있었던 거겠지.
어쩌면 남이 내게 어렴풋이 말해주길 내가 기다렸는지도.
손을 놓으라고, 뻗어라고, 그러면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바로 내가 바뀌었나? 그건 아니고...
나는 여전히 손 놓기를 주저하고 손 뻗기를 무서워한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해당부위는 항상 이상하게 아리고 기억과 감정은 여전히 날 괴롭히니까 말이다.
그러나 가끔 이유 없이 그냥 행동하는 순간, 문제가 풀리는 것을 가뭄에 콩 나듯 경험하고 있다.
놓고 뻗는 게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언젠가 오겠지 하며 오늘도 난 클라이밍을 하러 간다.
이유는 없다. 좋아지는 것에 그리고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쓰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 <더베어>의 대사가 생각났어요.
" I love you dude. Let it rip "
너무 좋아서 올 초부터 책상에 앉으면 바로 보이게 적어놓았어요. 생각해 보니 클라이밍도 그냥 해버리면서 시작된 거네요. 고민은 꽤 오래 했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