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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라 메이 Nov 20. 2020

6년 동안 말을 안 한 외국인 어린이

그 외국인 어린이가 말을 안 한 이유

나는 한국이라는 낯선 세상이 무서웠다. 그래서 말 없는 외국인 어린이로 살았다. 집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괜찮아, 말해도 돼.'라고 응원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왜 입을 다물고 고집을 부렸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나는 낯선 세계에서 오는 감정들을 받아들이는 법을 몰랐다. 그 감정들은 두려움, 불안감, 그리고 위협이었다. 나는 그런 상태로 불안정한 이민 생활을 했다. 어린 나이에 받아들여야 할 현실과 감정을 부정했다. 내가 말을 하면 부정하고 싶었던 현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게 때문에 말을 안 하려고 고집을 부렸다.


발표 시간

나는 국어 읽기 시간이 싫었다. 우리 반이 출석번호 순서대로 책을 읽다가 내 번호가 점점 다가오면 불안해진다. 마치 작은 파도가 거대해지면서 나를 잡아먹는 기분이었다. 내 차례가 되면 두 가지의 엔딩이 주어진다. 첫 번째는 내가 좋아하는 엔딩으로 내가 글을 읽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두 번째 엔딩은 선생님의 기분과 판단에 따라 일어난다. 선생님이 나를 보고 '오늘은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을래?'라는 눈빛을 보내면 내가 싫어하는 일이 벌어진다.


"오늘 한번 읽어볼래?"


그 한마디가 나오면 수업에 관심 없던 반 친구들까지 나를 쳐다본다. '오늘 드디어 듣게 되나.'하고 살짝 기대한다. 그럼 난 평소처럼 고집을 부린다. 일단 환하게 웃는다. 그 상태로 버틴다. 선생님이 한 문장 또는 한 단어만 내뱉으면 끝이라고 설득하면 난 더 환하게 웃는다. 싫다는 뜻이다. 사실 첫 번째 엔딩과 두 번째 엔딩은 모두 나의 승리로 끝나지만 두 번째 엔딩은  다물고 버텨야 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귀찮았다.


가창 시험

나는 모든 시험에 100점을 맞든 0점을 맞든 상관없었다. 내 관심사는 오직 목소리를 지키는 것뿐이다. 음악 시간은 모든 수업 중에 제일 피곤한 시간이었다. 특히 가창 시험은 날 지치게 만들었다. 가창 시험은 국어 시간의 읽기 발표보다 무서웠다. 그래서 가창 시험을 피하고자 엉뚱한 짓을 많이 했다.


제일 쉬운 방법은 감기를 걸리는 것이다. 나는 긴장감을 쉽게 느끼는 아이였다. 가창 시험을 떠오르면 배가 울렁거릴 정도로 긴장감을 느꼈다. 가창 시험 때문에 생긴 울렁거림과 감기가 함께 나타나면 심각한 증상처럼 보였다. 여기서부터 가창 시험에 관한 회개를 하겠다. 난 감기 걸릴 때까지 밖에서 신나게 놀고 차가운 음식을 많이 먹었다. 가창 시험을 피하기 위해 내 신체적인 지식을 가지고 결석을 여러 번 했었다. 엄마는 내가 단순히 아팠다고 생각했지만, 그 속에 음모가 있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가창 시험을 피했다. 



나도 사실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똥고집으로 목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사실 말을 하고 싶었다. 나도 교실에 들어가서 친구들에게 '안녕!'을 말하고 담임 선생님을 향해 "안녕하세요!"를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이들 앞에 서게 되면 마법처럼 입이 다물어진다. 나도 입 다물고 사는 게 괴로웠다. 평범한 어린이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늦었다. 난 말없이 사는 게 익숙했고 내 정신세계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진정시키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초등학교 6년 동안 말없이 살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말 안 하려는 똥고집을 없앤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변화하고 싶은 마음을 키우면 된다. 처음에는 어려웠다. '오늘은 친구들에게 인사해야지.'하고 다짐하면 다음 날 아침, 침묵의 인사를 할 때가 많았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목소리를 들려주겠다고 다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친한 친구들 앞에서 희미하게 목소리를 들려주는 기적을 일으켰다.


중학교 입학한 후 드디어 사람들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주게 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시작했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이 조금만 더 크게 말해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한 달 후, 다른 아이들처럼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불안정했던 내 세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외국인 어린이였을 때 불안정한 세계를 부정했는데 지금은 그 세계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시작으로 불안정한 세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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