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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May 10. 2020

시간을 빌려서 공부하는 엄마

당신이 빌려준 귀한 시간들, 아껴쓸게요

스물 일곱 살쯤이었을 때,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멋진 빌딩에 위치한 한 기업에 입사 원서를 내고, 최종면접을 보러 갔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미 일일이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수많은 회사에서 탈락을 경험한터라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긴장이 됐다. 면접이 끝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와 이런 곳에서 일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예상대로, 결과는 역시 낙방이었다.


그리고 약 3년 후 같은 빌딩에 위치한 다른 회사에 입사하게 되어, 6년동안 그곳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사실 회사 위치나 빌딩이 멋지고 안 멋지고는, 절박한 취준생에게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어쩌다 우연히, 그렇게 좋은 위치와 환경을 갖춘 회사에 다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바라던 곳에 취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로 행복하지가 않았다. 아니, 갑갑하고 따분해서 미칠 것 같았다.


매일 똑 같이 반복되는 업무들, 소소하게 겪어야 하는 성희롱, 아무런 비전이 보이지 않는 회사 업무, 승진도 할 수 없는 직무…… 철창에 갇혀 쳇바퀴를 굴리는 햄스터처럼, 갑갑하고 무기력했다. 철창이 아무리 멋져 봤자, 갇혀 있고 무기력하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취직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 회사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바깥이 얼마나 냉혹한 현실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버티려고 노력했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었기 때문에, 주말에 영어학원에 가거나 원서를 읽는 낙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차라리 이 취미를 본격적으로 해보면 어떨까, 통번역대학원에 가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영어나 번역일이 엄청나게 좋았다기 보다는, 아무런 비전이 보이지 않는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떠올린 대안이었다.


영화에서 보듯 강한 확신이 들면서, 내 길은 이거다! 라는 깨달음같은 것은 없었다.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그 와중에도 조금이라도 '싫지 않은' 분야, 조금이라도 '덜 질리는' 분야로 가지치기를 하다보니, 남은 선택이 '통번역대학원'이었을 뿐이다.


속물적인 계산기도 내려놓지 못해서, 한 1-2년 정도는 망설이며 준비를 하는 둥 마는 중 했다. 아직 회사를 다니고 있으니 절박하지도 않았고, 매달 따박따박 들어오는 고정적인 수입과 '회사원' 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안정감을 쉽게 놓지 못해, 애매하게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참 시시한 시작이었지만, 준비하는 과정은 결코 시시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결혼과 임신을 하게 되면서, 이 참에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과 출산을 ‘경력단절’의 기간이 아니라, 커리어 전환을 위한 ‘준비의 기간’으로 삼자는 야무진 포부였다. 10년간 쉬지 않고 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 이렇게 길게 쉴 수 있는 시간은 지금이 마지막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행복하고 느긋한(?) 고민이었다. 회사를 그만 두냐, 안 그만 두냐, 대학원을 가느냐, 안 가느냐의 문제는, 진짜 문제도 아니었다.


24시간 아이에게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육아의 시간이란… 공부가 다 무엇이며, 커리어가 다 무엇이냔 말이냐. 밥 먹을 시간, 화장실 갈 시간 조차 없었고, 여기 저기 아프고 잠을 못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찬찬히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산후조리원에서 돌아온 그날부터, 마치 밀물이 밀려들어오듯 우르르, 육아의 임무가 밀려들었다.


남편과 친정엄마를 제외한 모두가, 이제는 ‘애엄마’가 되었으니 애만 봐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해오는 것 같았다. ‘나’의 일, 나의 공부, 나의 커리어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에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꼈다. 내가 10년간 매달려온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마치, ‘애엄마’ 전환 모드 스위치가 켜져버린 AI 로봇마냥,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동네를 서성거렸다.


육아라는 파도에 떠밀려가면서, 통번역대학원 입시 공부는 저만치 있는 꿈, 뜬구름 같은 이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한줄기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주말엔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아이를 거의 맡기고, 카페에 가서 하루 종일 공부했다.


남편은 가장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해주었다. 하루는 너무 피곤해서 공부하러 나가기 전에 조금 미적거리자, 남편이 이런 이야길 한 적이 있다.


“나도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해서 오면 피곤하고 쉬고싶어. 하지만 당신 꿈을 위해서 참고 있는 건데, 당신이 그렇게 누워있으면 내가 뭐가 돼. 내가 마련해준 시간을, 귀하게 써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도 힘이 나.”


남편의 애정어린 눈빛, 간절함이 담긴 그 말이, 가슴에 오래 오래 남았다. 그렇지, 나는 이제 나 혼자가 아니지. 우리 아이가 엄마와 함께 있어야 할 시간, 내 남편이 종일 일하고 와서 쉬어야 할 시간, 연세 드신 친정 엄마가 편히 여가를 보낼 시간을, 나는 있는 대로 끌어다 쓰고 있는 것이다.


돈을 빌린 채무보다, 시간을 빌린 채무가 더 무겁고 부담이 되었다. 시간은 되돌려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 귀한 그들의 시간을, 무엇으로 보상할까?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공부하라고 내게 선뜻 내주었던 그 소중한 시간들.  나는 그 시간들을 깔고 앉아, 공부에 매달릴 수 있었다.


대학원 입학 후에도 하루 하루가 도전이었다. 엄마랑 떨어지지 않겠다고 우는 아이를 떼놓고, 학교가는 버스 안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아이가 아플 때는, 정말이지 다 때려치고 싶었다. 나만 그만두면 모두가 편할텐데.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닐까, 그런 자책감에 시달렸다.


친정부모님, 칼퇴근하는 남편, 아프지 않고 건강한 아이, 이 세 개의 바퀴를 매달고 아슬아슬하게 자전거를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바퀴 하나라도 펑크가 나면, 나는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제발 2년만, 아니 이번 학기만, 무사히 넘길 수 있기를. 늘 이렇게 기도하는 심정으로 학교를 다녔다.


2학년 1학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그 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이 공부의 끝이 어떤 길로 이어질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게 이 학교는, 외국어 공부의 차원을 넘어, 아예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몰랐던 공부의 세계. 내가 원래 사랑하던 문학의 세계. 수많은 글쓰기와 독서의 세계. 많은 작가들과 연사들의 세계.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공부하는 동기들과의 세계. 같은 공부를 하며 서로 격려하고 이끌어주는 세계.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같이 더 잘해보자고 격려하는 세계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그리고 이 도전은 나만의 도전이 아니었다. 남편, 부모님, 아이가 모두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합작품이다. 아이의 적응은 얼마나 놀랍고 눈부신지... 엄마가 공부하는 것을 기가막히게 알고 있다. 아직 말도 능숙하지 않은 어린 아이도, 엄마가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해가고 있는 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응원해주고 있다. 그렇게 귀한 응원을 등에 업고, 어떻게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가 없었다면 더 열심히, 수월하게 학교를 다니고 공부했을 거라는 말을 종종 듣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아이가 있기 때문에 나는 더 집중해서, 치열하게 공부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 조그만 손으로, 그 작고 귀엽고 순수한 얼굴로, 엄마 힘내라고 등을 토닥여줄 때면, 나는 온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저녁먹을 시간도 없이 방에서 과제를 하고 있을 때, 남편이 투박하게 만들어서 넣어주는 짜장면 한그릇과 단무지 한 접시에, 슬쩍 웃음이 터진다. 백마디 다정한 말과 이벤트보다, 이 소박한 밥상이 나에겐 더 소중하고 감동적이다. 내가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알지 못했을 행복.


내가 하는 공부가 어떤 길로 이어질지는, 이제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이걸 하는 과정 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미리 걱정하고 고민해봤자,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걱정을 하기에는, 내가 빌려쓴 시간들이 너무 귀하고 아깝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 한톨도 아깝지 않도록, 한톨의 후회도 남지 않도록,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받은 이 귀한 시간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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