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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Jun 06. 2020

'모범생' 트랩에 갇히지 않기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자세

나는 학창시절 내내 정말 모범생이었다. 선생님 말씀을 안 들으면 큰일 나는줄 알았고, 숙제를 안하고 학교에 간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전날 미리 가방을 다 싸놓고, 내일 입고갈 교복 상태나 신발까지 체크해두고 잠드는 스타일이랄까. 공부나 학교생활이 좋아서 그랬다기 보다는, 그냥 남에게 싫은 소리 듣기 싫고, 상처를 잘 받고, 예민하고 소심해서 그랬던 것 같다.


이런 것은 그냥 타고난 '성향'이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도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사회생활을 통해 조금 유연성이 생기면서 나름대로 농땡이(?)를 부릴 때도 있지만, 기본적인 성향은 어렸을 때 그대로인 것 같다. 이런 성격에게 가장 힘든 상황이란, 뭔가 예기치 않은 상황이 터지거나, 계획에 차질이 생겨 스케줄에 커다란 빵꾸(!)가 날 때이다.


사실 아무리 계획을 완벽하게 세워도, 계획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인생의 거의 모든 일들이 대부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걸 잘 알면서도, 할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의 찝찝함과 좌절감(?)같은 것들은, 항상 나를 심하게 자책하게 만들었다.


대부분 여자들이 이 '반성'을 참 잘하는 것 같다. 특히 '모범생' 스타일의 여성들이 더더욱, '자기 검열'에 엄격하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남보다 뒤쳐지는 내 모습을 용납하기가 힘들다.


또한 이런 모범생들은 대부분, 학창 시절에 무엇을 하든 '중상' 이상의 성과를 이뤘던 경험이 있다. 공부는 기본이고, 음악이나 체육, 미술, 심지어 아주 싫어하는 과목이라도 중상 이상으로 해낸다. 모범생답게, 모든 면에서 '어느 정도 이상'은 해낸다.


사실 이런 부분들이 어떤 면에서는 '독'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개성이 아주 강하다면, 호불호가 아주 분명하다면, 내가 어떤 걸 잘하고 못하는지 명확히 안다면 --- 인생의 선택과 집중을 좀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다른 일들을 하면서 방황했던 시간을 좀더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나이가 점점 더 들수록, 개성이 강한 것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니고, 주저 주저하며 아직도 내가 뭘 좋아하지 모르겠네, 라는 마인드로 살아가는 것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닌 것 같다. 그냥 각자의 속도가 다른 것 뿐이지,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특히 통번역대학원을 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늘 크리틱을 주고 받는 치열한 과정을 거치고 나면, 모두가 나름대로의 결점이 있고, 또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최대한 내 결점을 드러내고, 많은 크리틱을 받고, 과감하게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전이 온다. 그 과정은 힘들고 쉽지 않지만, 피할 수는 없다. 잘하는 친구들은 확실히, 사사로운 크리틱에 흔들리지 않는 것 같다. 받을 건 받고, 거를 건 알아서 잘 거른다.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된다. 참고할 사항만 잘 받아서, 내 것으로 만들면 된다.


솔직히 내 기준에서 '완벽하게' 끝낼 수 있는 과제는 하나도 없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자책하거나 압도당하지 말자고, 매일 매일 마음을 다잡는다. 그냥 '대충'이라도 끝내는 걸 목표로 시작하고, 정말 시작하기 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 날에는, 파일을 열어 내 이름이라도 적고, 저장이라도 해둔다. ㅎㅎ


모든 일을 이렇게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더블 클릭해서, 파일 만들어 저장하기. 딱 한줄, 아니, 세 글자. 내 이름이라도 적어서 바탕화면에 두기. 그리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파일을 열어서, 하나씩 문장을 만들어가면 된다. 형편없는 문장과 단어들로 가득해도, 결과가 실망스러워도, '아 그렇구나' 하는 마인드로 좀 쉬었다가, 다시 해보면 된다.


괜히 초반부터 완벽한 계획과 실행을 꿈꾸다가, 결국 '아 모르겠다' 하며 중도 포기하는 것보단, 일단 대충이라도 해보자, 라는 마인드로 시작해서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어깨에 힘은 좀 빼고, 머리도 좀 쥐어 뜯어가며, 그냥 일단 시작하고 보는 자세. 남들이 뭐라든, 아 그렇구나, 하는 자세. 하다보면 되겠지, 하고 마냥 낙관할 줄도 아는 자세. 5분에 한번씩 뚜껑을 열어가며, 요리가 잘 익어가나 확인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냥 믿고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자세. 그런 것들이, 나를 비롯한 '본투비' 모범생들에겐 꼭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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