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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Jul 08. 2020

아이가 내게 준 것

함께하는 것.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그것이 전부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정말 엄청난 일인 것 같다. 내가 일방적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우리는 함께 자라고 있었다. 아이도 부모를 자라게 하고, 부모도 아이를 자라게 한다.


아이는 상상 이상으로 똑똑하고, 영리하고, 놀라운 존재이다. 하루 하루 아이와 함께할수록, 어른들은 정말 아이에 대해서 잘 모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 한때는 아이였음에도.


너무 안타까운 점은, 아이가 가장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부모 역시 가장 젊고 정력적으로 무언가에 매진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이제 막 커리어의 정점에 오르려는 사람에게, 이제 막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부모의 역할에만 충실하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는 순전히 부모의 욕심과 선택으로 태어났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충분한 사랑과 케어를 받으며 행복하게 자랄 권리가 있다.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 그 자체이다. 이건 돈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는 가치이다. 핸드폰을 보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 함께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아이와 눈을 맞추고 상호작용하면서 같이 보내는 적극적인 시간. 이 세상에 부모의 눈길보다 비싼 장난감이나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는 아이는 없다. 그런 아이가 있다면, 애초에 부모가 충분히 눈길을 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말도 못하는 아기이기 때문에 흔히들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본능적으로 다 알고 있다. 엄마의 작은 표정 변화, 목소리, 분위기 속에서도 동물같은 본능으로 변화를 감지한다. 아이는 사랑받는 법을 알고, 사랑을 주는 법도 안다.


흔히들 아이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할 때,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1-2살 때는, 누가 아이를 봐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여력이 된다면 아웃소싱(?)을 해도 괜찮을 거라 여긴다. 어차피 기억도 못할텐데. 나 역시도 그랬다. 너무 육아가 고되고 힘든 나머지, 돈이 좀더 많았다면 시터를 고용하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도 경험하기 전에는 잘 몰랐었다. 아이와 부모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끈끈하게 연결되는지를.


나는 수없이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타면서, 아이의 토사물을 치우고 몇번씩 이불 빨래를 하며, 밤새 2시간에 한번씩 깨어 이유없이 우는 아이를 안아 달래며, 수십번씩 생각했다. 이 시간이 과연 지나갈까. 이 아이가 이 시간을 기억해줄까. 이 단순노동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아무도 나에게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를 불경스럽게(?) 생각했다. 엄마가 되면 당연히 하는 일들이지. 다들 그렇게 엄마가 되는거야. 남들은 당연히 하는걸 갖고, 왜 너만 힘들다고 하니.


하지만 말 못하는 아이를 하루종일 뒤치닥꺼리 하는 일은 외롭고 힘들었다. 신비롭고 위대한 모성? 집어치워. 납득이 되게 설명해보라구. 당장 잠도 못자고 화장실도 맘대로 못가서 미칠 것 같은데, 사랑 따위가 다 뭐냐구!!!


신은 인간에게, 무엇이든 거져주시지 않았다. 힘든 고난과 노동을 거치고 나서야, 나에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아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의 세계를 맛보게 해주셨다.


행동으로 이 아이를 온전히 책임지는 사랑.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입에 들어가는 것 하나 하나, 오줌싸고 똥싸고 토하는 모습 하나 하나, 무엇을 어떻게 먹었을 때 토하고, 어떤 음식을 잘 먹고, 어떤 소리에 예민하고, 어떻게 해야 쌔근쌔근 잘 자는지, 그런 작고 사소한 것들, 아이와 24시간 함께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들.... 그런 것들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나는 진심으로 이 조그만 아이에게 동화되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급박하고 선명한 현실이었다. 당장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이는 살 수 없었다. 아이가 꿀떡꿀떡 우유를 마실 때, 배가 빵실하게 나왔을 때, 곤하게 입을 벌리고 잘 때, 그 부드럽고 통통한 볼을 바라볼 때, 그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 순간, 하루 하루가 쌓여가며 우리는 끈끈하게 연결되었다.


아이는 나의 냄새, 나의 목소리를 듣고 안정을 찾았고, 나는 점점 더 이 아이를, 내가 그저 일방적으로 책임지고 희생해야 하는 양육의 '대상'이 아니라, 동등하고 온전한 '인격체'로 인지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저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실제로 함께 살을 부딪치고 많은 시간을 보내며 몸으로 터득하게 된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나 역시 이런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면, 여전히 아이를 일방적으로 돌보고, 가르치고, 훈육해야만 하는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서서히, 몇 년에 걸쳐 이루어졌고, 그 시간동안 아이와 나의 속도도 서서히 맞춰졌다. 아이도 나를 의지했지만, 나 역시 아이에게 의지했다. 아이를 꼭 안고 있으면, 정말 든든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온전히 기대있었다. 아이가 말을 못할 때에도, 우리는 충분한 대화(?)와 교감을 나누었다.


돌이켜보면 아이와 꼬박 붙어있던 그 시간들이, 서로에 대한 끈끈한 애착을 형성했던 가장 귀한 시기였던 것 같다. 남편도 일하는 시간 빼고는 온종일 육아에만 매달렸지만, 전업인 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이에게 일단 강한 애착이 생기고 나니, 외출할 기회가 생겨도 오랫동안 떨어져 있기가 쉽지 않았다. 나갈 때는 신나게 나갔다가도, 반나절만 지나면 아이 생각이 간절해졌다.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아이가 나를 보고 싶어하면 나에게도 그 마음이 느껴졌다. 아이와 나는 어느새, 떨어져 있어도 통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최근 대학원 과제 때문에 너무 바빠서 며칠씩 밤을 새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급격히 줄어든 시기가 있었다. 그 시간동안, 아이는 잘 놀다가도 종종 엄마를 찾았다고 한다. 바람이 불어서 문소리가 나면, 엄만가? 하고 뛰쳐나와 본다는 아이. 아무리 졸려도 눈을 비비며, 엄마가 귀가해서 책을 읽어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사랑스러운 내 아이.


그 두 세달 동안의 짧은 시간에도, 벌써 내가 모르는 아이의 시간이 생긴 듯 해서 가슴이 아팠다. 내가 이 아이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었는데. 아이는 내가 없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자라고 있었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느낌. 내가 모르는 시간이 점점 더 커져가는 느낌. 잘 맞았던 우리의 시간표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는듯한 느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자고 마음 먹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이쪽도 저쪽도 다 잘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난다.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아이는 오히려 의젓하게 엄마를 위로한다. 금새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문앞에 서서 '엄마 금방올게, 잘 놀고 있어~'를 몇번씩 반복해서 외치는 엄마에게, '알았어 빨리 문 닫어~' 라고 시크하게 대답하는 아이. '빨리 가서 공부해~ 방해 안할게.' 라고 말하는 아이. 언제 이렇게 훌쩍 커버렸을까.


너무 어른스러워진 모습에 마음 한 구석이 시려온다. 아직 어른스럽지 않아도 되는데. 철들지 않아도 되는데. 아이답게 떼쓰고 우는 것이 엄마 마음은 더 편한데. 좀 더 오래, 떼쓰는 어린 아이로 엄마 품에 있어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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