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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Aug 10. 2020

건강하게 오래오래 놀기 위해

더 재미있게, 오래 놀기 위한 '취미'의 세계

직장에 다니던 시절, 주말이 지나 월요일만 되면 상무님이나 전무님들이 늘 하시던 질문이 있었다.


"니나씨, 주말에 뭐했어?  요즘 젊은 친구들은 뭐하고 놀지?"


나는 이 질문이 참 이상했다. 뭐하고 노느냐니... 세상에 널린게 놀거리인데... 왜 그런게 궁금하신거지...?


그때 나는 결혼 전이었고, 아이도 없었고, 혈기 왕성한 30대 초중반이었으니, 놀 시간도 같이 놀 사람도 차고 넘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이해 못할 때였다.


세월이 흘러 나도 결혼을 하고, 정신없이 아이를 키우고, 40대에 들어서고 나니, 그때 왜 그런 질문을 인사처럼 하셨었는지 이해가 간다. 일단 그 정도의 나이가 되면, 잘 놀 수가 없다. 함께 어울려 놀 친구도, 그럴만한 시간도, 체력도, 급격히 줄어든다. 사실 예전만큼 노는게 그렇게 재미있지도 않다.


특히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그 이후의 삶은 책임감과 의무로 어깨가 무거워지는 인생이 시작된다. 뭐 꼭 결혼하거나 아이를 갖지 않더라도,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놀 수 있는 시기는 어느새 끝나버린다.


가정을 꾸리고 나면 당장 해야할 일들, 더 중요한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냥 '정신없이 하루 하루가 지나가 버린다' 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마 그때의 그 전무님, 상무님들도 그런 일상들을 보내고 계셨을 것이다. 조금은 부러움 섞인, 조금은 당신들의 찬란(!)했던 젊음에 대한 그리움이 묻은, 조금은 그저 호기심이 섞인, 그런 목소리로 안부 인사를 했더랬다. "요즘 애들은 어디서 뭐하고 놀아?"


그때 나는 회사 근처에서 혼자 살면서,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그런 때가 있었다니 ㅎㅎ) 시기였기 때문에, 어떤 월요일은 전날 늦게까지 마신 와인의 숙취가 남아 피곤한 얼굴로 출근을 했고, 어떤 월요일은 주말 내내 여행하고 와서 피곤한 얼굴로, 어떤 월요일은 새로 산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입고 들뜬 표정으로 출근을 했었다.


어떤 월요일은 너무 피곤하고 무기력한 나머지, 주말 내내 하루도 집 밖으로 안나가고 좋아하는 영화와 드라마만 종일 돌려보면서, 맥주와 분식과 피자로만 배를 채우고 겨우 몸을 일으켜 출근하는 날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마치 전생처럼 느껴진다. 오롯이 내몸 하나만 건사하며 살았던, 그런 때가 있었다니.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시기가 너무 짧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때도 마냥 좋고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불안한 미래와 부족한 나의 능력에, 커리어에, 연애에, 하고 싶은 일과 해야할 일들의 충돌에, 끝없는 고민들에 괴로워하며, 밤을 지새던 날들도 많았다.


중요한 것은, 그냥 나 자신만 잘 챙기면 됐던 싱글 시절이나, 해야할 일과 책임질 일로 어깨가 무거운 기혼의 애엄마 시절이나, 사실 본질적인 나 자신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뭔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자아의 일부분도 완전히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엄마'라는 이름, '아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나면, 내 자아까지 완벽하게 거기에 맞춰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내면의 나는 그대로이다.


내가 느끼는 나 자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여전히 나는 게으른데 열정적이고,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외로운 것은 싫고, 그 무엇보다도 내 가정이 소중하지만, 오롯이 나 자신으로도 있고 싶다.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하지만, 여전히 내 일도,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싶다. 더 이상 남들에게 젊고 매력적인 '이성'으로 보이려고 노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예쁘고 멋진 아줌마로 늙어가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마음 속에 여러가지 방을 만들어두려고 노력해왔다. 방을 여러 개 두고 내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다채롭게 있어야만 행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방들을 굳이 멋있게 이름 붙이자면, '취미'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를 키우다가 대학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한 교수님이 나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셨던 적이 있다. 흔하디 흔한 질문이었는데,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취미요? 취미라... 내가 그런게 있었나... 전 지금 애키우고 살림하느라 너무 바빠서 손톱 깎을 시간도 없는데요 교수님.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그날의 내 모습이, 나 자신에게도 꽤 충격이었다.


아직 미취학 아이를 키우는 아줌마의 입장에서는 그냥 '혼자'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시간만 있어도 감사하다. 계속 아이와 살림에 부대끼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끝나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는, 봤던 영화를 또 보고, 봤던 책을 또 읽는 것이다. 50번, 100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영화와 책들이 있다. 음악은 그렇지 않은데, 영화와 책은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른 작품들이 있다.


그 옛날 영화들을 볼 때면, 그 영화를 보던 시절의 내 모습이 동시에 떠오른다. 그 때의 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기분이다. 그냥 아무 이유없이, 누구의 공감이나 이해도 얻을 필요 없이, 유명한 작품이 아닌데도 그저 좋아서. 아무리 반복해서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그냥 좋아서. 그걸 계속 돌려보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참 행복하고 소중하다.


사실 생산성으로 따지면, 이런 것들은 전혀 '쓸데없는' 일에 속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히려 그런 '쓸데없는' 일들을 할 시간이 절실해진다. 생산적이지는 않지만, 그저 내가 좋아서 즐길 수 있는 취미에 푹 빠져서 몰두하는 시간을 갖고 나면, 지쳤던 마음과 정신이 한결 회복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다시 일상의 의무와 책임으로 돌아올 힘도 생긴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는 시간이 정말 즐거우려면, 일상이 정신없이 바빠야 한다. 너무나도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짬을 내서 놀 때, 실컷 일하고 공부한 후에 잠깐 취미 생활을 할 때, 그 잠깐의 시간이 가장 달콤한 법이다. 만약 한없이 놀 수 있고 무한정 시간이 있다면, 이렇게 노는 것이 재밌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때는 야구장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사실 야구 경기 보다는, 그 분위기를 즐기러 갔었던 것 같다. 해가 서서히 지면서 노을로 물드는 하늘, 햇빛 쨍쨍한 날에 시작해서 해가 저물어갈수록 서서히 더해가는 경기장의 그 열정적인 분위기, 야구장에서 먹는 맥주와 간식들, 사람들의 응원 열기와 소음들.... 그런 것들이 다 한데 어우러져 뿜어내는 신나는 분위기가 있었다.


야구를 좋아하고 잘 알아야만 야구장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응원가도, 선수 이름도, 야구 룰도 하나도 모를 때에도 종종 야구장에 가서 내 방식대로 그 분위기를 즐겼다. 친구와 맥주를 들이키며, 실컷 직장 이야기를 하고, 뒷담화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더랬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게 되면서 야구장 같은 곳은 못가게 되었지만, 나의 개인적인 취미 아이템은 넘쳐난다. 취미의 세계가 재미있는 것은, 아주 아주 작은 계기가 그 취미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이 마시던 와인, 인상깊게 본 영화 속 주인공의 스타일, 우연히 들어간 재즈클럽에서 듣고 반했던 악기 등등....


시작은 사소했지만 그 취미를 하는 시간과 경험이 차차 쌓이다보면, 내 나름대로의 스타일과 취향도 생기게 되고, 그러다보면 점점 내 스타일로 마음 속 '방'을 꾸미는 즐거움도 누리게 된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되었을 때, 마치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듯, 그동안 공들여 키워 온 나만의 취미와 함께 늙어갈 수 있다면, 참 멋진 인생일 것 같다.


일과 공부는 설렁설렁 할 수 없다. 정말 열심히 해야만 겨우 성과가 난다. 하지만 취미만은 그렇게 '열심히'만 하고 싶지 않다. 취미의 영역만은 게으르게, 싫증나지 않게, 하지만 오래 오래 곁에 두며 누리고, 잔잔하게 즐기고 싶다. 그렇게 오래도록 '잘' 놀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내 할 일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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