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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Mar 30. 2023

사랑했던 맥주여, 안녕

마흔 셋, 술을 완전히 끊다

나는 술을 꽤 좋아했다. 흔히들 술 자체보다는 술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애주가였다. 술도 센 편이었고, 정말 맛있어서 마시는 쪽이었다. 소주나 양주, 위스키는 못 마셨지만 맥주와 와인은 집에서도 자주 즐기는 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맥주, 내 사랑 맥주. 초여름 저녁 밖에서 마시는 청량한 황금빛 생맥주를, 나는 너무나 사랑했다.


서서히 해가 지며 주변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어가기 시작할 때, 대낮에 뜨겁게 내리쬐던 햇볕을 아직 머금고 있는 아스팔트와 시원한 밤공기가 뒤섞여 여름 냄새가 날 때, 싱그럽게 반짝이던 나뭇잎의 초록이 어느새 눈이 시리도록 짙어지고 무성해졌을 때, 나는 언제나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아, 맥주마시기 좋은 계절이 왔네! 


육퇴 후 마시는 맥주는 또 얼마나 꿀맛인가. 고된 육체 노동을 한 날에 들이키는 차가운 맥주는 유독 더 시원하고 맛있다. 아이를 재우고 캔맥주를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또 들었던 수많은 밤들.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늘 마음의 위로가 되어 주었던 내 친구, 맥주. 


이토록 오랜 시간 사랑했던 맥주에게, 나는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그냥 '술을 완전히 끊었다'라고 한 줄로 표현하기엔 뭔가 충분치 않은 느낌이다. 맥주와의 이별은 마치, 내 젊은 날과의 이별처럼 다가왔다. 젊음의 상징과도 같았던 맥주를 이제 못 마신다는 것은 마치 '넌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아'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감상적인가. 


술을 완전히 끊게 된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맥주를 몇 잔 마셨는데, 내가 너무 심하게 취해버렸다. 솔직히 친구도 당황했겠지만 가장 놀란 건 나 자신이었다. 이 정도에 취한다고? 내가?? 


친구와 기분좋게 마셨고, 다른 술 없이 오로지 맥주로만 몇잔 연거푸 마셨는데, 나는 필름이 끊길 정도로 취했다. 한동안 전혀 안 마시다가 꽤 오랜만에 마신 술이었고, 그날 일찍 퇴근한 친구 덕분에 초저녁부터 마시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로 취한다고...?


집에는 잘 왔지만 그 다음날 숙취로 정말 고생했다. 숙취란 걸 몰랐던 나였는데... 밤새 술마시고 와도 다음날 아침 일찍 운동하러 가서, 친구들을 진절머리나게 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는데...


정말 충격이었다.


이렇게 맥주 몇 잔에 기억이 끊길 정도로 취한다는 것은 이제 내 '간'도 끝났다는 신호였다. 그렇게나 운동도 열심히 하고, 술도 한 달에 딱 한 번만 마셨건만... 역시 나이 앞에서는 소용 없는 것인가. 


사실 그동안 계속 신호는 있었다. 주량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 술을 마셔도 전처럼 맛있거나 즐겁지 않다는 것, 술 마신 다음날 평소보다 훨씬 기분도 좋지 않고 컨디션도 나빠진다는 것 등등... 계속 느끼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해왔던 것 같다. 


평소에 술을 좋아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술을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기에 술을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끊기로 결심했다. 


맥주 한잔, 와인 한잔이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애주가에게는 다르다. 한잔이 두잔되고 한병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간단한 일이다. 한잔 마시느니 아예 안 마시는 편이 낫다는 입장이다. 


무엇보다도 술을 끊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는 아이 때문이었다. 취했던 그날, 우리 아이가 내게 전화를 걸었는데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별일은 없었지만, 아이 전화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받는 내가 그 전화도 못받을 정도로 취했다는 것은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다. 


아이에게 술취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을 수도 있고, 소리가 안들렸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 자신에게 너무 실망했다. 비록 와인 한잔이라도 아이 앞에서 술마시는 모습 자체를 보여주기가 싫고, 반주랍시고 아이 앞에서 술 한잔 하는 것에 죄책감이 드는 기분도 싫다. 그냥 깔끔하게 아예 안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이제 술마시는 것이 예전만큼 즐겁지 않다. 시간도 너무 아깝다. 나의 체력이 맥주의 청량한 탄산과도 같은 '젊음'과 멀어지고 있는 것도 확실하다. 하지만 다행히, 그 젊음에 포함된 내면의 '방황'과도 멀어지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내 가족에게서 얻는 즐거움이 너무나 상위 가치이기 때문에, 굳이 다른 자극적인 즐거움에 크게 끌리지 않게 되었달까. 그래서인지 술을 끊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애써 참고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익숙함 때문에 이별하지 못한 채 오래 만나온 연인과 비로소 헤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매일 아침 운동하는 것, 규칙적으로 일하고 글쓰는 것, 매일 독서하고 공부하는 것, 그날 하루 계획한 일을 모두 해내는 것, 매일 똑같은 루틴을 지키며 사는 것. 희안하게도 이런 일상이 가장 재미있다. 매일 똑같지만 똑같지가 않다. 


지난 달보다는 이번 달, 지난 주보다는 이번 주, 어제보다는 오늘, 나는 조금 더 나아지고 발전한다. 그걸 보고 느끼는 것이 가장 재미있다. 운동선수가 매일 훈련하듯, 나도 매일 주어진 훈련을 소화해내고 기록한다. 


언제인지도 모를 먼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며 오늘의 즐거움을 애써 억누르기만 한다면 뭐든 오래 지속하기 힘들다. 어제보다 아주 조금 나아진 내 모습을 발견하며 매일 나만의 보상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힘들고 지루한 과정도 동반되지만, 그걸 기꺼이 참아낼 수 있을만큼 보상의 기쁨은 크다. 


술이 없는 내 인생도 처음에만 좀 어색할 뿐, 시간이 갈수록 당연해질 것이다. 처음엔 어려웠던 것들이 점차 쉽고 당연하게 바뀌는 과정도 참 재미있다. 


한달에 9권씩 책을 읽겠다는 목표를 정했을 때, 처음엔 속도가 나지 않아 힘들었지만 이젠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매일 아침 운동하겠다는 목표도 처음엔 나가기만 하자, 걷기만 하자, 커피만 사서 돌아오자, 하다가 어느새 매일 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달리기는 매일 조금 더 빨라지고 있다.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는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 처음엔 핸드폰과 물병만 들고 나가다가, 이제는 그것도 짐으로 느껴져 모자만 쓰고 나간다. 안경도 벗고 달린다. 매일 똑같은 길을 달리니 굳이 자세히 볼 것도 없다. 


요즘 내 일상도 비슷하다. 달리기를 잘하기 위해 주머니를 비우듯,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가치만 남겨두고 모두 비워내고 싶다. 술도, 인간관계도, 쓸데없는 쇼핑도, 온갖 '스마트'한 물품들도, 나는 크게 필요치 않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메고, 그저 달리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가볍게 달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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