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소비노예의 자아 찾기
지름은 월급쟁이에게 합법적으로 허용된 마약이나 다름없다. 생존할 수 있을 정도의 소비가 덕목일 수 있겠으나, 그러기엔 올해 지름신의 성은은 유독 크고 아름다웠다. 분명 이사 왔을 땐 몸과 옷 한두 벌이 고작이었으나, 둘러보니 뭔가 많이 늘긴 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에 아마 앞으로도 "왜 입을 옷이 없을까?"라는 식의 질문은, 소비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할지 모르겠다. 잘 샀다 싶은 것도 있고 포장을 뜯는 순간 이걸 왜 샀지 하며 자책한 것도 있었다. 그들을 하나라도 의미 있는 소비로 만들어보고자 주옥같은 지름이란 이름으로 골라봤다. 방식은 군인과 독거노인의 바이블인 모 남성잡지를 따라했다.
올해의 감성 발뮤다 에어엔진 이른 봄부터 유난히 미세먼지를 조심하란 말이 많았다. 작은 비염을 갖고 있던 내겐 충분한 공포였고, 세계까진 아니어도 집 공기 만큼은 지키겠다는 다짐에 에어엔진을 발견했다. 사실 이 정도 가격대가 아니어도 대체할 수 있는 제품들이야 많았지만 그만큼의 '감성비'를 주는 건 발뮤다가 유일했다. 다른 선택지로 샤오미의 미에어도 있었지만 떡볶이를 먹어도 원조집을 찾고픈 마음과 같았달까. 설치하고 나면 특별히 할 일이 없다. 오토모드로 주야장천 켜두다가 한 달에 한번 정도 붉은 알림이 들어왔을 때 필터 먼지만 한번 제거해주면 끝. 뭔가 텁텁한 기분이 든다 싶으면 돌리는 제트엔진모드는 뭔가 더 깊숙한 폣속까지 깨끗해지는 느낌이 만족스럽다. 사실 공기가 정말 좋아진 건지 기분이 그런 건진 잘 모르겠다.
올해의 애매모호 LG 클래식TV 처음엔 별로 생각이 없었다. 관심 있는 프로 몇 개를 노트북으로 다시 보기 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오피스텔에 기본으로 제공되는 셋톱박스는 창고에서 1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 다시 보기를 하려 노트북을 켜서 접속하고 놓을 자리를 잡는 것이 번거로워졌고, 무엇보다 계속 고요한 것이 집에 허한 느낌이 들었다. 고르는 거 이왕 자취생의 로망인 클래식 TV를 선택했다. 유사 스펙 제품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이지만, 그만큼의 감성비가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아쉬움이다. 기왕 본체 외관뿐만 아닌 다른 디테일에서도 콘셉트를 가져갔다면 좋으련만, 유독 스크린에 나타나는 설정 인터페이스가 더 못나 보이는 효과만 낳았다. 다이얼 스위치엔 따다닥 하는 아날로그 느낌도 없고, 리모컨은 못난 기본 리모컨 그대로이다. 만약 다음에 LG의 클래식 라인이 나와도, 쉽게 선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올해의 인테리어 발뮤다 더 토스터 토스트를 할 때마다 물을 직접 넣는다는 것은 번거롭고 불친절한 과정이다. 때문에 보통의 스팀오븐 제품은 물탱크를 내장한 경우가 많다. 발뮤다는 적정량의 양을 따를 수 있는 무지리즘한 디자인의 컵과 도어의 잠금 부위 위치한 투입구는 번거로움을 자연스러운 요리의 과정으로 승화시켰다면 과장일까. 빵을 올려놓고 물을 쪼르르 따르는 것은 마치 어떤 사명감을 부여하는 성스러운 의식 같다. 두 개의 묵직한 아날로그 다이얼을 돌릴 때 손 끝에 걸리는 느낌과 효과음, 라이팅은 맥북의 사과 마크가 숨 쉬는 것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흡사하다. 이런 다이얼이 클래식 TV에 있었어야 했다. 과연 이 정도의 감성비를 줄 수 있는 부엌가전이 얼마나 있을까.
올해의 쇼룸 29CM 기본 생필품이나 오프라인과 가격차이가 좀 나는 가전을 제외하고는 온라인 쇼핑을 선호하진 않는다. 특히 의류는 직접 보고 입어봐야 하는지라 더욱. 리서치 차원에서 살펴본 29CM는 충분히 재미있는 앱이었다. 제품 자체를 돋보이게 하는 이미지와, 상품과 브랜드에 부여한 스토리, 깨알 같은 인터렉션. 가격대가 만만한 편은 아니나 가끔 이해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곤 어느 정도 수용 가능 한 정도였다. 유명하지 않은 작은 브랜드들이 '듣보잡'이 아닌 '유니크'하게 어필되게 하는 데 성공하였고, 장바구니는 차곡차곡 채워졌으며, 곧 짧은 행거가 아쉽기만 하였다.
올해의 할인 스팀 온라인 게임 스토어 플랫폼이다. 문득 몇 년 전 사둔 게임이 생각나 꺼냈더니 스팀도 자동 설치되었다. 당시엔 큰 존재감이 없던지라 신경 쓰지 않았지만 운명처럼 곧 뒤적거리고 말았다. 그러던 차 게이머 꿈나무 시절 마음에 두던 추억의 게임들을 천 원대에 할인하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 시리즈와 확장팩을 묶은 패키지의 할인율과 '이익'을 강조하는 문구에 홀렸다. 미국 서비스인 만큼 결제 과정도 심각하게 간단하다. 덕분에 구매 라이브러리엔 지금까지 한 게임보다는 앞으로 해야 하거나 하지도 못할 것들이 잔뜩 쌓여있다. 괜히 연쇄 할인마가 아니다.
올해의 잉여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원 스팀이 불러온 십여년 전 고장난 플레이스테이션에 대한 아련함과, 몇 해 전 MS가 강조했던 미디어 허브 전략이 어찌 돌아가는지 직접 보겠다는 핑계로 질렀다. 과거 콘솔게임과 다른 점은 게임을 하는데 단계가 많다는 점이다. 기기를 연결하고 팩이나 디스크를 삽입하면 바로 시작하는 게 과거의 순서였지만, 현재는 인터넷도 연결해야 되고 프로필도 등록하고 웹에서 아이핀 인증까지 한 다음 게임을 다운로드하여 설치까지 해야 한다. 그래픽이나 사운드 등은 그 표현이나 스케일에선 놀라울 정도지만 본질에 접근하는 단계가 매우 복잡해진 느낌. 스토어에서 바로 구매하여 다운로드하는 것은 디스크를 직접 구매하는 것 보단 간편한 방법이나 디스크를 구하는 가격보다 비싸 손은 잘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MS가 강조하다 게이머 팬에게 안 좋은 소리만 들었던 허브로서는? 윈도우 특유의 메트로 UI에 최적화된 인터페이스로 유튜브를 보거나 스카이프를 할 수 있고, 엣지 브라우저로 인터넷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이용을 하려면 키보드와 마우스, 키넥트 같은 추가 장비(=지출)가 있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 웹에서의 로그인/인증 까지 필요하다. 분명 집에서의 시간을 더 몰입하게 만들어 줬지만 이는 순전히 게임의 힘이지 미디어의 힘은 아직 아닌 듯하다.
올해의 보험 SKT T스마트세이프 자발적으로 가입한 최초이자 최후의 보험이다. 손에 기름이 많은지 자주 아이폰을 흘려 상처투성이로 만드는 내겐 톡톡히 효과를 보았다. 작년 여행에서 박살내고도 새 기기가 돌아왔고, 얼마 전 빗길에 넘어져 와장창 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험 보장제한과 현 기기가 멀쩡할 때 까진 잡스 최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리라.
올해의 진통제 쏘카 늘 자동차는 지름의 최종 보스같은 느낌이다. 직장과 집이 가까워 가끔 주말을 빼곤 그다지 필요성이 없기에 정말 장난감 이상의 의미는 아직 없다. 일전에 8퍼센트를 통해 소액을 투자한 이후 월 1시간 이용권이 나오니 요긴하게 쓰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도로 변수에 따라 계획적 이용이 어려워 시간 연장이 빈번하고 이는 적잖은 추가 요금을 지불로 이어지곤 했다. 그리고 사고시 처리에 대한 의문점과 좋지 않은 인터넷 후기들이 불안요소로 남아있다. 하여튼, 뇌내에선 시승과 계약에 인도하고 선팅과 세차까지 반복하지만 이를 긴 꿈으로만 두는데 큰 효과가 있다. 아마 꿈은 언젠가 깨겠지만.
by. 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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