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을 녹인 시간 속에서.

by 류온


열 살쯤 어린 너와 이렇게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될 줄은 몰랐다.


오늘도 너를 만나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지.

만 네 살, 한 살 아이를 돌보느라 3시간밖에 못 잔 너.

투정 부리는듯한 말투,

놀랍거나 신기한 일을 호들갑 떨며 전하는 모습도

내겐 사랑스러워 보인다.


두 아들을 많은 시간 혼자 돌보는, 씩씩한 엄마.

그럼에도 사랑이 넘치는 너.

낯선 이들과도 스스럼없이 친해지는 친화력,

누구에게든 할 말 다하는 당당함.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에너지,

그 리더십.

나는 부러워했지.


문제가 생기거나 큰 변수가 생겨도,

분주해 보이는 행동 속에 단정, 단호한 너의 말.

그래, 네 속엔 단정과 단호가 있었지.

빠른 상황 판단과

주변에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단정함.

상황을 정리하고 해결하는 단호함.


너는 임기응변에 강하지만,

너의 긴장도는 얼마나 높았을까.

그렇게 소진된 에너지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너는 타인을 돕는 일엔 먼저 발 벗고 나서지만,

남들에게 기대거나, 의지하지 않으려는 강인함을 가졌지.

그 속에 홀로 보낸, 백조의 물갈퀴질 같은 시간.

그 외로운 힘듦을 안다.

힘든 내색 좀처럼 하지 않는 네가

힘들다고 할 땐, 그것이 진정임을 안다.


내가 아는 것이 극히 일부라 할지라도,

나는 그런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너의 신혼집으로 초대해서, 손수 밥을 해주었지.

전날부터 핏물 빼 만든, 야들야들 살살 녹던 갈비찜과 색색의 반찬들.

부지런한 손길 속에 담긴 그 정갈함은 너를 닮아있었고,

차려진 식탁은 장금이란 별명이 무색했지.


커피와 마카롱까지.

디저트 맛집을 찾아 사다 나른 뚱카롱.

그렇게 자주 보고 친한 사람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는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아는 너.


내가 출산한 지 70일쯤,

나를 만나러 그 먼 길을 달려왔지.

너의 아이를 등원시키곤, 나와 내 아이를 보러.

귀여운 아이 옷과 꽃다발, 화병까지 사들고.

내게 제대로 된 화병이 없단 걸 어찌 알았을까.

말하지 않아도 캐치해서 챙기는 그 센스가 참 고마웠다.


연고하나 없는 타지에서의 내 삶을,

내 마음을 아는듯한

너의 챙김은 큰 위로가 되었지.

그러곤 또 후다닥, 너의 아이를 하원하러 날아간 너.


그때의 그 몇 시간이 내겐 오래도록 큰 힘이 되었다.


무엇을 하든 진심인 너는,

자신을 알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깨어있는 사람.

자신의 에너지를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더 쓰는 사람.

나에게도 전해지는 너의 긍정,

그 따듯함을 안다.


아홉 살 어린 너를,

내가 의지할 수 있게 된 것도 아마,

네가 먼저 내민 그 따듯함일지도 모른다.



문득, 너에게 참견하던 내 모습이 스친다.

친하지 않던 시절,

입사지원서류 봉투에 주소를 휘갈겨 쓴 너에게,

정자로 써야 한다며 오지랖을 부렸지.

이런 것까지 참견하냐는 너의 눈빛.

그때의 표정이 왜 아직도 선명할까.


그리고,

천연비누를 만들던 너.

하나같이 널 닮은 예쁜 비누라고 생각했지.

단정하고 온화한 색의 조합.

그건 너만이 만들 수 있는 비누였지.

새벽까지 하나하나 정성을 쏟은 말끔한 비누들.

주문량이 많아 며칠을 밤새던 어느 날,

포장을 도우러 잠시 올라간 내 앞에서..

어느새 눈물을 보였지.


버거웠구나.

그 엄청난 양을 혼자 감당해 내느라..

"울 일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무심하게 한마디 건넸지만, 마음이 아팠다.

더 일찍 도우러 왔어야 했는데,

정말 무심했던 내 모습에.


친하지 않으면서 함께 나누던 시간.

무심한 말들이 쌓이고 쌓여

무심했던 말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무심히 지켜봐 주는 것만으로 힘이 되었던

시간들이 마음들이 켜켜이 쌓여

10년, 11년... 셀 수도 없게 되었지.


그러다 깜짝 놀랐지.

우리 벌써 10년이나 됐냐며..

이 수다, 저 수다...

주제가 있다가 없다가.

인생이 우릴 흔들면 우리도 이렇게 흔들리겠지.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같은 공간에서 같은 흐름으로, 이리저리.

엇박자가 나면 꺄르륵 꺄르륵.


너와 함께 흔들릴 수 있어서 큰 위로가 돼.

함께라면 없던 힘도 생겨.


아홉 살 어린 너는,

대충 말해도 내 마음에 들어와 본 사람처럼,

나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고 응원하지만,

거침없이 비판하기도 하지.


솔직한 너의 말을 듣는데

난 왜 마음이 놓이면서도 피식 웃음이 날까.


너다운 모습으로,

나다운 모습으로,

우리가 함께하고 있는 시간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던 거겠지.


나의 수요메이트.

매주 널 만나러 가는 길이 즐거워.

너는 내가 힘들까 봐 늘 걱정하지만,

난 쉬러 가는 거야.

힐링하러 가는 거야.


가장 너답고, 나다울 수 있는 그곳으로,

널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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