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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래블 Aug 03. 2019

12. 산티아고 순례길, 비가 그치고 난 단단해졌다.

'내가 여기 왜 왔지?!' 젠장, 산티아고 순례기

걷기 9일 차 _ 나헤라(Najera) ▶ 산토 도밍고 데라 칼자다 (Santo Domingo de la Calzada) : 20km




비가 갠 후 빛나는 하늘


점점 이 길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다. 

오늘은 호텔 밖을 나서자 비가 내렸다. 얼른 우비를 입었지만 걱정되었다. 고어텍스 잠바와 모자는 어제 건조기에 넣고 돌려서 그런지 방수 기능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비가 곧 멈췄다. 구름이 물러간다. 날이 개자 더 아름다운 하늘이 나타났다. 구름이 개며 등 뒤로 떠오르는 태양. 순례길을 걷는 동안 매일 다른 일출을 만난다. 혼자 걸으니 풍경 사진도 천천히 찍으며 길을 걷게 되었다.  


비가 내린 순례길의 아침
구름이 걷히는 중
산티아고 순례길은 등 뒤로 해가 떠오른다.





걸으면서 떠오르는 책


걸으면서 내가 읽었던 책을 떠올린다.


순례길 초반에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내가 애벌레 같았다. 길을 기어가다가 다들 위로 올라가길래 따라 올라갔는데 그위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그리고 내려와서 나비가 되었다는. 혹시 내가 그 애벌레처럼 아무것도 없는 무언가를 향해 힘들게 올라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가는 길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는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생각났다. 삶에 의미를 더했을 때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이 길도 마찬가지다. 나만의 의미를 더하자 조금씩 길이 다르게 보인다.



오늘은 걸으면서 '스토너'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을 읽을 때 나는 주인공의 인생이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죽기 전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말한다. 내가 걷는 이 순례길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지난 10일을 떠올려본다.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내가 이 길을 왜 걷나, 왜 사서 고생하고 있나 회의감도 들었지만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아마 산티아고에 도착해 지난 여정을 되돌아보면 좋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할 것 같다. 




길에서 만난 헝가리인


혼자 한참을 걷다 며칠 전부터 계속 인사만 하던 헝가리 남자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바에서 또띠아와 카페 콘레체로 아침식사도 함께 하고 같이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몰디브, 남미, 터키, 인도네시아 등 정말 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해 궁금해했다. 나는 젊은 사람들은 좋은 일자리를 원하지만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고, 집값이 비싸 젊은 사람은 집을 렌트해 살아가는 반면, 치안이 좋아 카페 테이블에 모든 소지품을 올려놓아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북한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자세히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영어가 짧아 한국인들은 평화를 원하고 개인적으로 나는 언젠가 북한도 여행해보고 싶다고 얘기했다. 내가 걸음이 느려져 그와 헤어지고 혼자 걸었다. 






새로운 동행자 


오늘은 호호님과 조조님이 머무르는 알베르게로 갔다. 나와 같은 날 순례를 시작한 한국분들이다. 국립 알베르게는 사실 론세스바예스 이후 처음이었다. 나는 계속 사설 소규모 알베르게만 갔기에 이런 곳은 또 신기했다. 젊은 서양 순례자들이 많았다. 조조님은 계속 국립 알베르게에 머물면서 와서인지 아는 사람이 많아 보였다. 같이 마트에 들려 장을 보고 저녁을 위해 직접 요리를 했다. 요리를 하는데 어떤 독일 남자가 우유와 계란 노른자로 옆에서 푸딩을 만들어 먹는다. 맛을 봤는데 완전 맛있었다. 신기. 


재재 언니와 아롱 언니와 헤어지면 혼자 어쩌나 했는데 이렇게 금방 새로운 동행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순례길의 매력인 것 같다. 


산토 도밍고 데라 칼자다



순례길의 하루를 마치며  


저녁을 먹으면서 한참 수다를 떨다가 나는 먼저 일어나 저녁 미사를 드리러 갔다. 굉장히 작은 성당이었다. 하지만 아늑하고 좋았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젊은 신부님께서 굉장히 열정적으로 강론을 하셨다.


미사 후 성당에서 나눠준 카드. 미사가 끝나면 신부님이 순례자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주시기도 한다. 꼭 챙겨가길..!!



일출을 보면서 걷다가 처음 만나는 bar에서 카페 콘레체에 또띠아를 아침으로 먹고, 

계속 인사만 하던 외국인과 함께 걸으며 넌 어느 나라에서 왔냐, 왜 여기에 왔냐, 이런 대화를 나누고,

또 한참을 화살표를 따라 걷다가 목마르면 다시 bar에 들어가 오렌지주스를 사 먹고,

성당이 나오면 들어가서 스탬프도 찍고, 기도도 드리고,

그러다가 점심쯤이면 어느새 오늘 머물 마을에 도착하고,

저녁거리를 사다가 맛있는 와인과 함께 저녁을 해 먹고,

먹은 뒤에는 스페인 성당에서 평일 미사를 드리고.

점점 여행의 맛이 느껴진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베드버그에 물린 뒤 나는 단단해졌다. 



산티아고 순례길 TIP


Q. 마트에서 맛있는 와인을 고르는 팁이 있나요?


마트에 가면 다양한 와인이 있다. 그중 RIOJA라고 쓰여있는 와인은 거의 다 맛있다. 가격도 저렴하다. 2~5 유로면 살 수 있다. 이 지역에서 나는 포도로 만드는 와인인데 대부분 스페인에서 소비되고 수출은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먹기 힘들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포르토 와인보다 리오하 와인이 훨씬 맛있었다.



리오하와인과 마트에서 산 저녁. 이 정도면 꽤 괜찮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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