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또래블 Nov 17. 2019

22. 산티아고 순례길, 철십자가를 만난 날

'내가 여기 왜 왔지?!' 젠장, 산티아고 순례기

19일 차 _ 엘간소 (El Ganso) >> 몰리나세카 (Molinaseca) : 31.9km



밤새 제대로 못 잤다......


숙소 시설도 좋았고, 침대 1층을 사용하여 자리도 좋았다. 다만 어제 저녁을 너무 포식한 탓인지 배가 더부룩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침실 안에 화장실이 있는 구조라서 다들 자고 있는 와중에 화장실을 가는 게 민폐일 것 같았다. 소리도 나고, 불도 켜야 하고... 후 ~~ 침대 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뒤척거렸다. 


어찌어찌 잠이 들었고 일어나 보니 오전 6시가 넘어 있었다. 준비하고 나오니 대략 7시. 이 마을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선뜻 혼자 출발하기가 망설여졌다. 밖은 가로등 하나 없이 새카맣게 어두웠다. 어떤 커플이 나갈 준비를 하길래 기다렸다가 같이 나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


밖으로 나오니 밖에 별이 가득하다. 매일 아침 별을 봤지만 오늘처럼 별이 많은 것은 처음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도 봤다. 길을 걸으며 한 5개는 본 것 같다. 별똥별은 생각보다 천천히 슈웅-하고 내려갔다. 신기했다.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보고 있으니 왜 옛날 사람들이 땅은 평평하고 하늘은 둥글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별이 하늘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었다. 별이 없는 하늘에서는 볼 수 없는 동그란 밤하늘을 보았다. 어두운 밤은 무서웠지만 빛나는 별은 설렘을 주었다. 



별 정말 많았는데 사진으로 제대로 담지 못했다. 아쉽~~ 




철십자가로 향하는 길 


1시간 30분 정도 걸으니 어제 자려고 했던 라바날에 도착했다. 호호님과 조조님은 여기까지 와서 잤다. 라바날에는 한국인 신부님도 계시고, 미사에 멋진 아카펠라도 있어 인기가 많은 마을이라고 한다. 조금 아쉬웠지만 어제 저녁 식사도 참 좋았기 때문에 괜찮다. 그리고 어제는 정말 도저히 더 걸을 수가 없었다. 잘 멈췄다고 생각했다. 



라바날에서 철십자가로 올라가는 길. 날이 흐렸다.



힘을 내어 올라갔다. 초반 오르막길은 스틱이 있어서인지 힘들지 않게 슉슉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야 철의 십자가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구름 낀 하늘에 철 십자가. 날이 흐려서 그런지 그리 멋지진 않았다. 조금 실망...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사진은 한 장 남겨야지~ 찍어줄 사람이 없어 십자가 앞에서 기다리는데 멀리서 스페인 아주머니들이 오신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도 찍어드렸다. 나보고 혼자 왔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어디서부터 걷기 시작했냐고 물어본다. 프랑스 생장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하니 너무너무 놀라신다. 혼자서 대단하다고 ㅋㅋ 잠깐 대화를 나누며 친해졌다.



철십자가




흔들리는 멘탈을 붙잡기 위해 


철의 십자가를 지나니 이제는 쭉 내려가는 길이다. 순례길은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힘들다. 한발 한발 조심히 내려가는데 확 짜증이 났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나 화가 난 것이다. 



순례길의 다양한 풍경



발 컨디션이  안 좋아지니 베드버그에 물렸을 때처럼 마인드 컨트롤이 안 됐다. 흔들리는 멘탈을 붙잡기 위해 '그래도 다행인 것들'을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힘든 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래도 다행인 것을 일기장에 하나하나 적으며 마음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

1. 생각하면 스트레스이긴 하지만 그래도 돌아갈 회사가 있어서 다행이다.
2. 집에 너무 돌아가고 싶다! 집이 너무 돌아가고 싶은 곳이라 어찌나 다행인지!
3. 배드버그에 물려 엄청 고생했지만 흉터 없이 잘 가라앉아 다행이다.
4. 그래도 날씨 좋은 가을에 와서 다행이다. 다른 계절에 왔으면 더 힘들었을 뻔!
5. 힘들지만 물집도 안 잡히고, 다친 곳도 없고 다행이다. 
6. 조조, 호호님을 만나 맛난 음식 잘 해먹고 다닐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갑자기 흐렸던 날씨가 맑아진다.      



맑아진 날씨. 고도 약 1,200m



혼자 걷는 길. 높은 고도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동영상도 찍고, 셀카도 찍으며 천천히 즐기며 걸었다. 그렇게 즐기면서 걷다 보니 드디어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새 나타난 다음 마을



점심 겸 오렌지쥬스와 참치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었다. 맛있었다. 참치 샌드위치 먹고 있는데 지나가는 오토바이족~ 동영상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 맛있게 먹고 다음 마을로 출발~! 





다음 마을은 그리 멀지 않았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마을인 것 같았다. 사람이 없는 마을이지만 마을 자체는 아주 깔끔했다. 이곳 역시 창틀마다 빨간 꽃이 핀 제라늄 화분이 놓여있고, 창 안쪽은 하얀 레이스를 달아놓았다. 참 이쁘다. 


사람은 없었지만 예뻤던 마을




최악이었던 지옥의 돌길


이 마을을 지나면 오늘 머물 마을까지 약 4~5km 정도다. 앞으로 약 1시간이면 괜찮을 거라 만만히 생각하며 걸었다. 그런데 아뿔사! 완전 지옥의 돌길이었다. 발바닥이 너~~무 아팠다. 아파서 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 힘들었다. 초속 4cm로 걸었다. '그래도 다행이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도 소용없는 지옥의 돌길이었다. 그래서 노래를 틀었다. 이번에는 드리마 '미생'의 OST를 틀었다. 금요일 밤 12시까지 야근한 사람보다 몸이 무겁고, 멘탈이 부서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발이 아팠다. 그래도 미생 OST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 다행히 2~3곡 정도 들으니 어느새 마을 가까이에 도착했다. 오늘도 노래가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누가 일부러 돌조각을 뿌려놓은 것 같았던 길... 이런 길이 1시간 넘게 이어졌다.




아름다운 몰리나세카


오늘 머물 마을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 벨이 살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마을 초입에는 햇볕에 빛나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면 파란 지붕을 가진 낮은 건물이 좁은 골목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골목에는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아름다운 마을, 몰리나세카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장을 보고 나오는 호호님이 보였다. 호호님을 따라 오늘 머물 숙소로 갔다. 마을 끝 길가에 하얀 벽에 빨간 지붕을 가진, 이곳 역시 창틀엔 제라늄 화분이 놓여있는 알베르게가 있었다. 조조님과 호호님이 미리 내가 잘 침대도 맡아놓으셨다. 계속 2층 침대에서만 잤는데 이곳은 모든 침대가 1층 침대였다. 게다가 방 안의 큰 창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왔다. 내가 늦게 도착한 편이라 그런지 샤워 공간도 넉넉했다. 뜨거운 물로 기분 좋게 샤워하고 세탁도 했다. 저녁으로는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역시나 와인도 함께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발바닥이 너무 아파 멘소래담을 듬뿍 발라 마사지를 하고 이불속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



저녁에 직접 만들어 먹은 파스타와 와인




순례길의 의미 



산티아고는 길이 이곳에 올 사람을 부른다고 한다. 

가고 싶다고 아무나 다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체력, 시간 등 많은 조건이 따라줘야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길은 왜 나를 부른 것일까?     

걷기 19일 차. 이제 남은 길보다 지금까지 걸은 길이 더 많다. 그런데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사실 너무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80%까지 잘하다가 끝에 가서 포기했던 경험이 꽤 있었기에 이번에는 어떻게든 끝을 볼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아픈 발을 하고 억지로라도 다 걷는 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다 건너뛰어버리고 끝부분만 천천히 걷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산티아고에 다녀와서 쓴 에세이를 읽어보면 다들 행복하고, 얻는 것이 많아 보였는데 난 왜 그렇지 않을까? 난 이 길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얻는 것이 있기는 할까? 마음이 복잡한 밤이었다.      

     

계속...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TIP


Q. 좋은 발 컨디션 유지하는 법이 있나요?     

     

1. 발가락 양말 신기     

나는 injinji라는 브랜드의 발가락 양말을 사 갔다. 얇은 발가락 양말을 신고, 그 위에 두꺼운 등산양말을 신었다. 이렇게가 한 세트다. 발가락 양말을 신으면 발가락끼리 서로 부딪치지 않고 물집이 안 잡힌다고 한다.      

     

2. 매일 밤 크림을 바르고 마사지하기     

스페인 아주머니가 추천해준 방법으로 밤마다 바세린을 발에 듬뿍 발라 마사지를 해주면 피로도 풀리고, 물집도 안 잡힌다고 한다. 어떤 독일인 부부는 순례 후 서로 발마사지를 해주는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크림은 꼭 바세린일 필요는 없다. 순례길 약국에는 다양한 종류의 foot cream을 판다. 순례자가 많아 이런 제품이 발달한 것 같았다.      

     

3. 발이 아플 때는 쉰다.     

부르고스, 레온 등 큰 도시에서는 하루 더 머물며 쌓인 피로를 푸는 사람들이 많았다. 순례길 후 족저근막염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치료 약이 따로 없고 무조건 걷지 않고 쉬는 것이라고 한다. 나도 족저근막염에 걸려서 그렇게 발이 아픈 것이었다. 근데 그때는 이런 병이 있는지도 몰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21. 산티아고 순례길, 순례자들과 대화 많이 한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