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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래블 Nov 16. 2019

21. 산티아고 순례길, 순례자들과 대화 많이 한 날

'내가 여기 왜 왔지?!' 젠장, 산티아고 순례기

18일 차 _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Hospital de orbigo) >> 엘 간소 (El ganso) : 28.4km




오늘은 순례자들과 대화를 많이 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6시 40분. 나 빼고 이미 숙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분주하게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방 문 바로 앞에 있는 침대에서 자서 사람들이 내 앞을 엄청 지나다녔을 텐데도 세상 편하게 잤다. 어제 아주 오래 걸은 데다가 뜨끈한 홍합탕을 배불리 먹어서 푹 잘 수 있었나 보다. 서둘러서 나갈 준비를 하고 나왔다.




독일에서 온 '가지'


어두운 길을 따라 걷는데 앞에 어떤 사람이 멈춰 서있다. 24살의 '가지'라는 이름의 독일에서 온 예쁜 여자다. 혼자 가기에 길이 너무 어둡고 무서워 같이 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와 함께 걷게 되었다. 



점점 환해지는 순례길



걷다 보니 길이 밝아졌다. 나는 걸음이 느려서 우리 둘의 사이가 벌어졌다. 서양인들은 정말 잘 걷는다. 근데 앞에서 또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다시 같이 걷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운동을 좋아하냐, 보통 식사할 때는 무엇을 먹냐, 형제는 어떻게 되냐, 강아지는 키우냐, 직업은 뭐냐 등. 개인적으로 산티아고를 걸으며 내 또래의 유럽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제일 좋았다. 영어권 사람이 아니라서 영어를 할 때 서로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천천히 말하기 때문이다. 또 사는 곳은 다르지만, 인터넷으로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 보니 공통점도 찾기 쉬웠다. 유럽의 많은 여성들이 요가나 필라테스에 대해 알거나 직접 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인스타그램도 쓰고 있었다. 





Bar에서 아침까지 함께 먹고 같이 길을 가다가 또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가지'는 오늘 아스트로가에서 머문다고 한다. 나는 아스트로가보다 더 갈 생각이기 때문에 빨리 걸었다. 오늘은 아주 날씨가 좋았다. 특히 아스트로가에 도착하기 전에는 날씨도 좋고 풍경도 좋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따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날이 화창했지만 태양이 떠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푸른 숲이 더 푸르게 보였다. 그 길을 서둘러 걸었던 것이 돌이켜 보니 아쉽다.



순례길에 서있는 순례자 동상




가우디의 건축물이 있는 '아스트로가'


아스트로가는 꽤 큰 도시였다. 이곳에서 가우디가 설계했다는 궁전과 대성당을 구경했다. 궁전은 겉에서만 봤다. 대성당도 입장료가 있어 들어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언제 여기에 다시 올까 싶어 돈을 내고 들어갔다. 사실 스페인 시골에 있는 성당은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감흥이 덜하다. 이탈리아 로마, 피렌체, 프랑스 파리에서 봤던 성당이 워낙 임팩트가 컸기에 그런 것 같다. 그래도 마르코 복음과 요한 복음을 공부하고 와서 그런지 성당 안에 걸려있는 회화 작품을 보면서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모르고 왔으면 하나도 안 보였을 텐데 이런 재미가 있어 좋았다. 



가우디가 설계했다는 궁전



가우디가 설계했다는 대성당 외부와 내부




너무 뜨거워 탈진할 뻔


성당 구경 후 다시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길 자체는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거의 없어 걷기 좋았다. 근데 오후가 되자 태양이 너무 뜨거워졌다. 특히 산타 카탈리나 데 사모자까지 가는 1~2시간은 정말 뜨거웠다. 앞뒤로 사람도 없는데 일사병으로 쓰러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래서 길을 걸으며 틈틈이 물도 많이 마시고, 요거트도 먹고, 바나나도 먹고, 계속 쉬면서 갔다. 걷다가 바람이 불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걷다가 구름이 태양을 잠시 가려 그늘이 생기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그늘에 앉아 있으면 찬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시원한데 내리쬐는 태양이 너무 뜨겁다. 한국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날씨였다.





마을에 도착하니 호호님과 조조님이 마을 입구의 바에 앉아있다. 얼굴을 보자마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여기 앉아서 레몬 맥주를 마셔보라고, 너무 시원하고 맛있다고 추천해주셨다. 정말 너무 시원하고 맛있었다. 



뜨거운 거리 끝에서 마신 레몬 맥주의 맛은 잊을 수 없다.



옆 테이블을 보니 못 보던 한국인 모녀가 앉아있다. 그들은 오늘 라바달이란 곳까지 간다고 한다. "안 힘드세요?" 물으니 오늘은 아스트로가에서부터 쉬엄쉬엄 걸어온 것이라 힘들지 않다고 한다. 보통 순례자들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쯤 다음 숙소에 도착하는데 이 모녀는 느즈막이 출발하여 조금씩 걸어 산티아고로 간다고 한다. 다음 마을인 라바달에 한국인 신부님이 계셔서 그곳에서도 넉넉히 3일은 머무를 생각이라고 한다. 같은 곳에 와도 사람마다 여행의 방식이 이렇게 다르다. 조금 멀지만, 나도 라바달까지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라바달까지 못 가고 엘 간소에서 멈추다


그러나... 난 라바달까지 못 가서 엘 간소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 멈춰 서야 했다.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어제 무리를 한데 이어 오늘도 너무 많이 걸은 것 같다. 


엘 간소는 워낙 작은 마을이라 제대로 된 알베르게가 있을지 걱정되었다. 마을에 들어서고 조금 안으로 들어가자 첫 알베르게가 보였다. 겉에서 봤을 때 흠..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는 알베르게든 바든 아무 데나 들어가지 않고 내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는 안목이 생겼다. 조금 더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생각했다. 


별로 안 걸었는데 어느새 마을의 끝이다. 다행히 마을 끝자락에 알베르게 하나가 더 있었다. 좀 전에 본 알베르게보다 훨씬 깔끔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주인은 없고, 독일인 부부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면 주인이 곧 올 거라고 했다. 앉아서 기다리는데 주인이 안 오자 아까 독일인 남편분이 주인 할아버지를 데리고 오셨다. 알베르게 옆에 작은 슈퍼가 하나 있는데 두 곳을 같은 집에서 운영하는 것인가 보다. 주인은 저녁 식사를 주문할 것인지 나에게 물어봤다. 가격이 다소 비쌌지만 근처에 큰 마트도 없고, 혼자 저녁을 차려먹기는 힘들 것 같아 식사를 주문했다.



엘간소에서 머물렀던 알베르게




호주에서 온 '피자'와 함께 한 저녁 식사


식사 시간이 되어 옆 건물에 있는 식사 테이블로 갔다. 나랑 호주에서 온 50대 아저씨 딱 2명만 저녁을 주문했나 보다. 둘만의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빵, 하몽, 샐러드, 파스타, 디저트가 차례로 나왔다. 정말 맛있었다. 특히 치즈와 올리브, 아보카도와 각종 견과류가 들어간 샐러드가 가장 맛있었다. 스페인 가정식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료는 신선했고, 간은 세지 않았지만 각 재료의 맛이 코와 혀를 자극했다. 



정말 내 스타일이었던 샐러드.



이름이 '피자'인 호주 아저씨와 나는 마주 앉아서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아저씨는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천사를 만났다고 했다. 초반에는 걷는 게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한국인 여자가 와서 네 신발이 잘못되었다고 함께 새로운 신발을 골라주고 양말도 바꾸고 그랬다고 한다. 그 뒤로 발걸음이 엄청 가벼워지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며 흥분해서 말했다.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은데 사라져 버렸다고 산티아고의 천사를 만난 게 아니냐며 웃으며 말한다. 나도 산티아고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에 대해 말했다. 발이 너무 아프고, 힘든데 그렇게 아저씨와 산티아고에서 만난 사람들 얘기를 하니 마음이 좋았다. 



소스가 별로 없는데도 참 맛있었던 파스타. 내 스타일. 이런 건 이제 어디 가면 먹을 수 있을까?



계속...



산티아고 순례길 TIP


Q. 순례길에 화장품을 챙겨가야 할까요?


떠나기 전 나도 궁금했다. 혹시라도 다 화장하고 예쁘게 다니는데 나만 화장 안 한 맨얼굴에 꼬질꼬질하면 어쩌지? 그래서 화장품은 가벼운 펜슬형 아이브로우와 입술에 바르는 틴트를 하나 챙겼다. 다행히 대부분 화장 안 한 꼬질꼬질한 얼굴로 걷는다. 솔직히 아침 일찍 떠나야 하는데 사람들과 다 함께 쓰는 화장실에서 거울 하나를 차지하고 화장할 시간도 없고, 순례길을 다 걷고 나서는 화장 지울 힘도 없다. 처음엔 어색할지 몰라도 나중에 되면 정말 편하고 좋다. 


근데 피부가 민감한 편이라면 폼클렌징과 로션은 잘 챙기는 것을 추천한다!!! 짐 줄인다고 비누 하나만 달랑 가져갔는데 갑자기 얼굴에 여드름이..... 레온에서 폼클렌징을 사서 그걸 쓰니 다행히 여드름이 가라앉았다 ㅠㅠ 생각보다 폼클렌징은 큰 거 안 가져가도 된다. 10cm짜리 작은 것을 샀는데 산티아고 다녀와서 지금까지 거의 세 달째 쓰고 있다.


또, 러쉬 고체 샴푸가 좋다고 추천해서 그것도 2만원이나 주고 사 갔는데 머릿결 개털 되고, 고체 샴푸라 물에 자꾸 녹고, 샤워한 후 가방에 넣기 전에 바짝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중간에 10cm 정도 크기의 여행용 샴푸(1유로)를 하나 샀는데 그걸 썼더니 머릿결도 훨씬 좋아지고 편했다. 여행에도 기술이 필요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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