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 왜 왔지?!' 젠장, 산티아고 순례기
걷기 17일차 _ 레온(Leon) ▶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Hospital de orbigo) : 35km
아침에 일어나 한 방을 쓴 브라질 여자와 어색어색하게 헤어지고...
(일어난게 분명한데 내가 준비해서 나갈 때까지 침대에서 안 일어남... 자는 척 함...)
오늘도 어김없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두운 레온을 빠져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도시라 길도 많고, 차도 많다.
한참을 걸어 레온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도로 앞 바에 들려 아침을 주문했다. 보통은 골목 한 귀퉁이의 바에 들리는데 큰 도시 근처라 그런지 바 앞으로 자동차가 달리는 큰 도로가 놓여있었다. 이런 풍경을 보며 먹는 아침은 또 새롭다. 오늘은 카페 콘레체와 함께 카스테라를 먹었다.
다시 힘을 내서 걷는다. 걷다가 신호등에 막혀 잠시 멈춰 섰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다가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돌아봤는데 성당이 있다. 며칠 전 이곳을 먼저 지나간 재재 언니가 카톡으로 예쁜 성당이 있으니 들러보라고 추천한 곳이었다. 신호등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칠뻔했다! 성당이 나 보고 가라고 붙잡은 느낌이었다.
성당은 현대적이면서도 위엄이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가니 매우 심플했다. 내부가 온통 알록달록한 그림과 금빛의 성물로 가득했던 성당과 비교가 됐다. 화려한 성당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나는 스페인에서 본 성당 중 이곳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심플하지만 가볍지 않았고, 위엄이 있지만 과하지 않았다. 정말 마음에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작은 곳 하나하나까지 공을 들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찍었는데 도장까지 예뻤다.
성당을 나와 다시 걸었다. 태양빛이 환하게 내리쬐었지만, 바람이 선선하여 걷기 좋았다. 오늘은 왠지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기분 좋게 길을 걷는데 갈림길이 나타났다. 노란 화살표가 두 방향을 모두 가리킨다. 하나는 내가 걷는 프랑스길이고, 다른 하나는 대체 도로인 것 같다. 내 앞에 가던 사람은 프랑스길 말고 다른 길로 향한다. 뒤따라 걷던 나는 그 길이 지름길이구나 싶어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갔다.
노란 나뭇잎이 듬성하게 매달린 나무와 그 사이사이로 비치는 밝은 햇살. 시원한 바람이 불면 나뭇잎과 함께 햇살도 흔들렸다. 내가 유럽의 가을도 느껴보는구나. 감사하게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앞뒤로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이렇게 앞뒤로 사람이 없던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어제 사람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터라 '사람이 없으면 좋지~'라고 생각하며 그냥 계속 걸었다.
아무리 그래도 뭔가 이상했다.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마을에 있는 지도를 한참을 쳐다봤다. 알고 보니 지름길인 줄 알았던 길이 사실은 더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뿔싸!!!! 그래서 사람이 없었던 거구나... 이제와 돌아갈 수도 없었다.
12시가 지나자 태양은 머리 위로 올라왔다. 그늘 하나 없이 이어진 뜨거운 옥수수밭을 한 3시간은 걸은 것 같다. 앞뒤로 사람이 없어 핸드폰으로 영화 <맘마미아 2> OST를 틀어놓고 걸었다.
Look into his angel eyes
One look and you're hypnotized
He'll take your heart and you must pay the price
노래 듣는 동안은 신이 나서 힘차게 걸었다. 노래가 가진 힘이 이렇게 강력하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걷고 걸어 목적지 전 마을까지 도착했다. bar에 들려 오렌지 쥬스를 마시고 화장실에 들렸다가 다시 재정비 후 출발했다. 너무 피곤해서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산티아고까지 가려면 일정이 촉박했다. 그래서 다른 순례자들보다 더 많이 걸어야 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순례길을 걸은 것은 산티아고에 와서 처음인 것 같다. 겨우겨우 오늘의 목적지인 오스피탈 데 오비고에 도착하니 오후 4시다. 마을에 들어서자 소설 돈키호테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다리가 근사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발이 너무 아프고 피곤해서 감탄할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발이 이렇게 아픈 것은 산티아고를 걸은지 17일 만에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물집 하나 안 생기고 멀쩡했는데 발이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도착한 알베르게는 마음에 들었다. JTBC 예능 '같이 걸을까'를 촬영하며 god가 이 알베르게에 머물렀다고 한다. god가 여기 오지 않았더라도 알베르게 곳곳이 너무 예쁘게 꾸며져 있어 마음에 들었을법한 곳이었다. 화려한 색감의 그림이 곳곳에 걸려있었고, 1층은 아늑한 거실과 주방, 2층은 순례자 숙소로 분리되어 있었다. 거실과 주방은 나무 소품이 많아 전체적으로 포근한 인상을 주었다.
왜 때문인지 따뜻한 물이 안 나와 찬물로 대충 샤워를 하고 나오니 몸이 떨리고 으슬으슬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을 위해 호호님, 조조님과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저녁이 되자 날이 흐려져 더 추웠다. 감기 기운 있는 것처럼 춥다고 말하니 조조님이 홍합탕을 끓여먹자고 한다. 마트에서 홍합이 아주 쌌다. 그리고 메인메뉴는 제육볶음이다. 장 볼 때는 너무 춥고 힘들었다. 여기까지 온 것도 너무 힘들었는데 또 장을 보러 마트에 가고, 서서 요리를 준비해야하다니 평소와 달리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완성된 뜨끈 뜨끈한 홍합탕 국물을 먹으니 몸이 다 나은 것 같았다. 호호님, 조조님 덕분에 저녁에 항상 든든하게 먹는다. 이분들께 잘해야 하는데 체력적으로 힘든 여행이다 보니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다.
산티아고를 걸으며 조금은 음식 솜씨가 늘은 것 같다. 집에 가면 가족들에게 내가 직접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스테이크와 감바스, 그리고 여기서 와인도 한 병 사 가야지. 기대된다.
Q. 순례길에 가져간 물건 중 잘 가져간 것, 안 가져가서 후회한 것이 있나요?
잘 가져간 것은 카메라.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가져갈지 말지 고민하지도 않고 카메라를 챙겼다. 대신 DSLR 말고 크기가 작지만 성능이 좋기로 유명한 SONY RX100을 가져갔다. 워낙 핸드폰 카메라가 좋기 때문에 디카를 가지고 온 사람은 흔치 않다. 하지만 핸드폰 카메라로는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가져가서 매우 뿌듯하고 좋았다.
안 가져가서 후회한 것은 이어폰. 사람들이랑 많이 소통하고 싶어서 이어폰은 일부러 안 챙겼다. 근데 밤에는 시끄러운 코골이,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노래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중간에 살까도 생각했는데 아이폰은 이어폰 잭이 달라서 비싸고 쉽게 구하지 못할 것 같아 그냥 포기했다. 참고로 신나는 노래는 걷는 데 엄청나게 힘이 된다! (이건 정말 참 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