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가 80년 넘게 연구한 행복조건이 '관계'라고 했지만...
살아온 배경과 나이대별로 시간에 대한 밀도와 종류는 다르다. 돌이켜보면 내 20대와 30대의 매 해, 매 달에는 나름대로의 주제가 있었다. 어떤 때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온 에너지를 쏟았고, 어떤 때는 뜨거운 연애에, 또 어떤 때는 치열한 직장 업무에 꽂혀 있기도 했다. 그렇게 매 시기마다 나를 정의하는 키워드는 달라져 왔다. 그 사이사이 켜켜이 존재하는 찰나와도 같은 '혼자만의 시간'은 나를 지금 이 순간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오늘 점심시간,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스타벅스 한복판에서도 나는 구석 자리에서 노이즈캔슬링 헤드셋을 끼고 잔잔한 클래식을 듣는다. 그리고 나만의 생각에 잠기며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긴다.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는 이 순간만큼은, 나만의 투명한 돔(Dome) 안에서 오직 내 영혼이 나를 지배하는 아바타 세상의 느낌이다. 마치 아바타가 '영혼의 나무'와 교감하듯이 나는 거대한 소음을 차단하고 오직 내면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성스러운 세계에 접속하는 기분이다. 이러한 순간들만큼은 하루 중 유일하게 어깨에 들어간 힘이 풀리고, 팽팽했던 긴장이 이완되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타인의 소음을 끄고, 로그오프를 선언
심장이 보내는 경고음을 듣고 난 후, 수시로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는 내 평소습관과는 정 반대로 해보기로 했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것.'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만 사람들과 떨어져 있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도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는 것을 없애고, 스마트폰 속의 알림, SNS의 타임라인에 보이는 화려한 콘텐츠들, 타인의 기대, 세상의 속도… 나를 둘러싼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로그오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누군가에게 선언을 하고 다닌 것은 다니지만 내적인 선언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혼자 있는 시간이란, 단순히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카톡 소통, 연락 등에서 완전히 벗어난 시간이다. 내게는 로그오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항상 외부와의 연결을 ON으로만 해놓고 살았기 때문에, OFF를 해보는 연습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을 사람들은 디지털 디톡스라고도 부른다. 물론 디지털 디톡스도 다이어트처럼 너무 극단적으로 하면 요요현상이 온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의 차단이 필요함을 직감했다. 완전히 세상과 단절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으로 줄인 후, 저녁마다, 주말마다 혼자만의 멋진 동굴을 찾아 들어갔다. 때로는 익숙한 내 방 책상 앞이었고, 때로는 서울에 있는 한강이나 공원의 나만의 고요스팟 이었고, 때로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낯선 동네의 구석진 예쁜 카페였다.
[의도적인 고독] 불안과 지루함, 그 너머의 고요
솔직히 처음 의도적인 고독을 외치며 혼자 있는 시간은 심심하고 어색했다. 늘 누군가와 대화하고, 무언가를 기획하고,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 익숙했던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은 단 10분이라도 마치 죄악처럼 느껴졌다.
'이 시간에 영어 단어라도 하나 더 외워야 하지 않나?'
'책 한자라도 더 읽고 메모해야 되는 거 아냐?'
'남들은 주말에도 모임 나가서 인맥 쌓는다는데 나만 도태되는 거 아닐까?'
정적을 틈타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손은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찾아 화면을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나는 꾹 참고, 나 자신의 습관적인 욕구들을 기다려주는 연습을 했다. 그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 보기로 했다. '지금 내가 불안해하는구나. 심심해하는구나.' 그 감정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30분, 1시간... 소란스러운 마음의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자, 거짓말처럼 어떤 '고요'가 찾아왔다.
내 안의 영혼과 마주 앉은 시간
외부의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나의 진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마치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던 옛 친구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었다. '나'라는 친구였다. 나는 다이어리를 펼치고 무작정 메모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표가 아니라, 진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욕망들을 끄적였다. 좋아하는 차의 향기를 맡으며 멍하니 밝은 햇살들 사이로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았다. 내가 어떤 색깔을 좋아했는지, 어떤 문장을 읽을 때 가슴이 뛰었는지, 내가 잃어버렸던 영혼의 감각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Language has created the word 'loneliness' to express the pain of being alone. And it has created the word 'solitude' to express the glory of being alone."
"언어는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Loneliness)'이라는 단어를 만들었고, '혼자 있는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 '(Solitude)'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 폴 틸리히 (Paul Tillich)
영어 Loneliness와 Solitude는 어감이 매우 다른데, 한국어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Solitude는 영어사전에서는 '고독'이라고 표현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고독의 느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독'과 '고요' 그 어딘가쯤의 충만한 느낌이다.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외롭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혼자 있는 시간들은 외로움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완전한 충만함이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내 기분과 감정을 내가 제일 먼저 알아주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완벽하게 안전함을 느꼈다. 엉켜있던 생각의 실타래가 풀리고, 과열됐던 뇌가 식어가며, 쿵쿵대던 심장이 제 박자를 찾아갔다. 나를 다시 살려낸 건 대단한 병원의 처방이나 해외여행이 아니었다. 서울 한복판, 시끄러운 도시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만들어낸 '완벽한 단절'과 '밀도 높은 고요'. 그 짧은 틈새, 찰나의 시간들이 방전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혼자 있는 시간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벽이 아니라, 내가 다시 세상으로 건강하게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급속 충전기'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려지고 행복하다. 이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방식이다.
1938년부터 80년 넘게 이어진 하버드대학교 성인 발달 연구는 명확한 진실을 밝혀냈다.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관계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마음이 통하는 깊은 관계의 친구가 있는 삶은 엄청난 행복이니까. 이 거대한 진리 앞에서 나는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그럼 우리는 지금 당장 바쁘고 지치고 혼란스러운 도심 속에서..."
"좋은 관계가 없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나?"
"퇴근 후 텅 빈 반으로 돌아가는 우리는 실패한 삶인가?"
"인생이 빠듯한데 관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사람은..?"
관계 빈곤의 시대, 신문 속 김 대리의 퇴근길
나는 '중앙일보' 종이신문을 구독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바스락 거리는 신문을 집에 들여오는 게 참 좋다. 최근 신문 1면에서 발견한 '관계 빈곤'이라는 단어가 뼈아프게 다가왔다. 기사 속 30대 직장인 김 씨의 삶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번듯한 직장은 있지만, 퇴근 후 그를 기다리는 건 배달 음식과 스마트폰 게임뿐이라고 했다. 카톡 친구 58명 중 마음을 나눌 친구는 0명. 그는 "말하기 좀 그렇지만, 외롭다"라고 고백했다. 지금 서울에는 수많은 김 씨가 살고 있다. 취업 준비로 친구들과 멀어지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동료와 선을 긋고, 가족과도 메신저로 대화하는 시대.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만,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 AI와 대화하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고독과 고요의 결정적 차이
이런 시대에 하버드의 연구 결과만을 들이밀며 "행복하려면 나가서 사람을 만나라"라고 조언하는 건 조용한 폭력일지도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억지로 만든 관계는 더 큰 피로감을 주니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괜히 이렇게 된 게 아니란 말이다. 사람들이 지긋지긋하고 삶도 피곤하니깐 AI랑 소통하고 속풀이를 하는 것이다. 다만 김 씨를 불행하게 만든 건 '혼자 있어서'가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방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을 흔히 '고독(孤獨)'이라 부른다. 국어사전의 사전적 의미도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이다. '고독사 했다'는 말도 자주 들린다. 이 단어는 어딘가 처량하고,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한 듯한 쓸쓸한 뉘앙스가 묻어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고요'라고 부르기로 했다. 고독이 텅 빈 방에 혼자 남겨진 쓸쓸한 느낌이라면, 고요는 시끄러운 세상의 볼륨을 줄이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의 뉘앙스다.
김 씨가 퇴근 후 배달 용기 뚜껑을 여는 대신,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정성껏 저녁을 차려 먹었다면 어땠을까? 스마트폰 게임 대신, 향초를 켜고 읽고 싶던 책을 펼쳤다면? 물리적인 상황은 같지만, 마음의 온도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혼자 잘 있는 사람이 같이도 잘 있는다
남편과 나는 철저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 해외여행을 같이 가더라도 아침시간은 종종 각자 보낸다. 남편이 산책하고 먹고 싶었던 식당에 갈 때, 나는 아침요가 원데이클래스를 등록해서 혼자 요가를 하고 공원 같은 곳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다. 주말에 남편이 영화 보고 싶다고 하면 같이 갈 때도 있지만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때 내 취향이 아니면 나는 그 시간에 카페에서 노트북을 하거나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렇다고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집중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받는다.
하버드의 연구가 틀린 건 아니다. 결국 인간은 타인들과 깊은 연결이 되어있어야 행복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의 전제는 '혼자서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냐?'에 달려있다. 그래야만 타인과도 건강하게 연결될 수 있다. 자신의 고독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관계에 오히려 집착하거나 의존하게 될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자신만의 리추얼로 단단하게 엮어온 사람들은 타인을 '외로움을 달래줄 도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온전한 나로서 다른 사람들과 깊은 관계가 건강하게 형성된다.
혼자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해볼 만한 리추얼들이 무궁무진하다. 이러한 별 것 아닌 일상 속 촘촘한 리추얼들로 내 삶이 충만해졌다. 상황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지만 이렇게 마음이 꽉 찬 느낌은 남편도, 엄마아빠도, 친구들도, 어느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영역이다.
스페인 투우장에서 소가 잠시 숨을 고르는 피난처를 '케렌시아'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케렌시아(Querencia)는 어디인가요?
- 도심 속 '케렌시아(Querencia)' 찾기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는 단골 카페 구석 자리
퇴근길 또는 출근 전, 잠시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한강의 윤슬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 스탠드 불빛 하나 켜진 내 책상